자유공산주의전선의 정치 노선/강령

서문 : 왜 재-조직인가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의 한 복판에서 태어났다. 방역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던 시절, 각자의 위치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여서는 안된다는 소수의견을 주장하던 우리는 하나의 모임을 건설했고, <혁명적 아나키스트의 조직적 연대체>, <아나키스트 연대>라 자칭했다.

우리가 스스로를 <혁명적 아나키스트의 조직적 연대체>라 이른 데에는, 우리 내부에서 다음의 두 가지에 대한 공고한 합의가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하나. 우리는 대중의 직접행동이 아닌 의회주의적 · 대리주의적 행보를 보이는 “아나키즘”을 지양하였다. 우리에게 아나키즘은 피지배계급의 자기 해방의 이데올로기였고, 그 자기 해방을 위해 필요한 것은 사회복지를 강화하거나 의회에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대중조직을 건설하고, 그 투쟁을 조직하며, 조직된 투쟁을 모아내는 과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 우리는 체제로부터의 개인적 도주를, 일부 영웅적 개인의 테러리즘을 찬미하는 “아나키즘”과 결별하고자 하였다. 우리에게 체제는 단호한 거부로 사라질 유령이 아니요, 개인적 투쟁이 흔들어 틈을 낼 수 있는 허접한 관념도 아니었다. 우리에게 체제는 공고한 물질이기에, 그 체제를 무너트릴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로 공고한 인민대중의 조직뿐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이 지났다. 우리는 지난 5년간 누적하여온 현장에서의 경험과 학습을 바탕으로 우리를 재조직하여 <자유공산주의전선>을 건설한다.

이는 우리가 ‘아나키즘’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지난 5년간 조직을 세워내고, 운동의 원칙을 고민하고, 대중조직 속에서 대중과 관계맺고, 아나키스트 활동가들과 교류하고, 비(非) 아나키스트 활동과들과 교류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아나키즘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더욱 날카롭게 벼려내었다. 그 담금질의 과정 속에서 우리가 내어놓은 결론은,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이데올로기를 표현하기에 너무도 광범위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강령/노선을 재점검하고 다시 써내려가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이데올로기를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허울 좋은 ‘개인’의 해방이 아닌, 현존 체계 아래에서 억눌리고 고통받는 피지배계급의 자기해방을 목적으로 둔다. 우리는 개별 활동가들의 느슨한 연대가 아닌 정치조직을 기반으로한 투사적 활동가들의 이데올로기적/전술적/조직적 단결을 조직론으로 둔다. 우리는 평화로운 통합이 아닌 분열 속에서의 치열한 투쟁을 방법론으로 둔다. 우리는 ‘대중의 혁명적 자기완결성’에 기대어 대중이 스스로 떨쳐일어나는 것을 기다리기보다, 대중의 안에서 가장 혁명적인 대중의 일부로써 대중에게 가해지는 혁명적 추동력이 되기를 선택한다.

우리는 한국의 투쟁적 민주노조운동의 현장파 전통의 영향을 받아 자생한 좌파 이데올로기로서, 국제 아나키즘 운동에서 미하일 바쿠닌 - 에리코 말라테스타 - 네스토르 마흐노/디엘로 트루다의 노선과 겹침을 확인한다. 이는 현대의 ‘분파적’ 구분에 따라, 강령주의(Platformism)/정향아나키즘(Specific Anarchism)-에스페시피스무(Especifismo)와 그 결을 같이함을 의미한다. 또한, 해당 경향성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로써, 우리는 자유공산주의(Libertarian Communism)를 채택한다.

우리는 이 노선/강령을 통해 우리의 운동과 전략/전술을 구체화하고, 다른 운동의 노선과 스스로를 구분하려 한다.

아나키즘은 분열과 투쟁의 이데올로기다. 혹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 모든 개인의 개별성을 최대한으로 존중하고, 그 개별성 속에서 “용인할 수 있는 다름”을 가진 자들끼리 조직을 건설하고, 그 조직이 자기 개별성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하여 다른 조직과 때로는 투쟁하고 때로는 논쟁하고 때로는 동맹하면서, 결과적으로 합의에 이르는 사회야말로 아나키즘이 그토록 갈망하는 바 아래로부터 건설된 탈중앙화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좌파”라고, 최소한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칭한다면, 통합과 단결을 이야기하지 말아달라. 스스로 더욱 날카롭게 분열하여 자신의 운동을 세워달라. 그렇게 세워진 여러분들의 운동과 우리의 운동은 서로 다르기에 서로 투쟁하겠지만, 사회적 필요에 따라 언제고 동맹하여 통일전선 아래에서 모이지 않겠는가. 이것이 아나키즘이 말하는 바 연방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강령은 하나의 독트린이 아니다. 모든 이들에게 정답이어야 하는 문건도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사회혁명의 방법론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강령에 가해지는 모든 비판을 환영한다. 그 비판과, 그 비판에 맞서는 우리들의 투쟁이야말로, 우리의 운동과 우리의 이론을 더욱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칼날’이, 억압과 착취의 체제를 끊어내고 모든 이가 자유롭게 살아가는 해방을 이루어낼 우리의 무기가 되리라 믿는다.

세계 노동자의 사회혁명 만세!

2025년 여름,

자유공산주의전선


도입 : 논의의 방법론

우리는 우리의 정치노선/강령을 논의함에 있어 다음과 같은 절차를 거쳤다.

1. 목적

우리는 정치조직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힘이 가해져 물체의 상태가 변하지 않는 한, 모든 물체는 정지해 있거나 등속직선운동을 하는 상태를 유지”하고, 그 상태가 변화하는 경우, “운동의 변화는 가해진 힘에 비례하며, 그 힘이 가해지는 직선을 따라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물리계는 물론이고, 사회의 원칙으로서도 정합하다.

누군가가 ‘모멘텀’, 혹은 추동력을 형성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변화하지 않는다. 또한, 추동력을 가하여 사회의 변혁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변혁의 방향성은 ‘그 힘이 가해지는 직선’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사회를 특정한 방향으로,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의 방향으로 변혁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힘이 향하는 방향을 선명하게 가져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노선/강령에서 가장 먼저 다루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제 아나키즘이 무체계의 늪을 떠날 때가, 가장 중요한 전술적, 이론적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망설이는 것을 벗어날 때가, 명확하게 인지된 목표를 향해 단호하게 움직일 때가, 조직된 집단 실천을 시행할 때가 되었다.”

2. 일반적 구조분석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개인들의 저항이나 영웅적 테러리즘, 반란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고고한 학술과 이론의 층위에서 아름다운 철학적 목적을 세우는 것 역시 충분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우리의 ‘목적’은 현존 체제에 공고하게 발을 디디고, 그 조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존 체제의 구조에 대한 일반적 분석을 그 다음 논의의 과제로 두었다.

3. 전략

전략은 우리의 목적을, 현존 체제의 구조에서 달성하기 위한 일반적 방법론이다.

4. 전술

우리가 전략을 시행해야 하는 터전은 2025년 현재의 한국사회이기에,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는 그 정세에 대한 분석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다만, 앞선 1-3까지의 내용과 달리, 정세는 유동적으로 변화하기에, 정세분석과 그에 따른 전술 역시 유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으로 두었다.


목적

사회혁명

현존 사회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하고 위계적인 구조 위에 서 있다. 이 구조는 ‘누가 어떻게 지배하는가’의 문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을 관통하는 계급적 지배관계에 의해 유지된다. 이 체제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체제, 생존을 위해 굴종을 강요받는 삶, 지배자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기계처럼 소비되는 인민들 위에 건설된 사회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혁시킬 필요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떠한 혁명인지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무수히 많은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들을 보아왔다. 하지만 이 혁명들이 피지배계급의 삶을 바꾸었는가? 역사는 그리 말하지 않는다. 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성씨가 권력을 잡았던 역성혁명, 대중이 촛불을 들었으나 결국 기득권의 얼굴만 바뀌었던 한국의 정치사, 심지어 노동자 계급의 이름으로 정권을 잡았던 러시아 혁명조차 모두 하나의 공통된 결말로 수렴한다. 지배계급은 교체되었으되, 지배구조는 남았고, 피지배계급은 여전히 억압받는다. 계급을 폐기하기 위해 혁명하였으나, 남았던 것은 혁명가들의 계급 상승이었다.

결국 다시 한번, 구조의 문제다. 누가 지배하느냐가 아니라, 누군가는 지배하고 누군가는 지배당하는 사회구조의 총체적인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사회혁명은 단순한 정권의 교체가 아니다. ‘생산수단의 소유관계’가 되었건, ‘젠더에 따른 폭력’이 되었건, 특정한 부문에 대한 변혁을 이루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혁명은 공고한 피지배계급의 대중조직이 자기해방을 위한 투쟁을 통해, 스스로의 손으로, 아래로부터 사회의 모든 부문에 존재하는 권력관계를 타도하고 그 폐허 위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변혁이어야 한다. 정권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 자체를 뿌리째 뒤엎는 것이다. 계급 없는 세계, 지배 없는 사회. 그것이 우리의 목표다.

이런 사회혁명은 필연적으로 계급적 지배의 구조를 정면으로 타격하게 된다. 단순한 개량이나 부분적 수선은 자본주의적 질서가 언제든 흡수하거나 허용할 수 있지만, 체제의 근간을 겨냥하는 혁명은 곧바로 폭력적 충돌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체제는 결코 스스로 무너지지 않고 권력은 자발적으로 내려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급진적이고 총체적인 계급전쟁에서, 우리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가. 인류 역사에서 혁명보다 더 많이 발생하였던 전쟁들의 전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도덕적 정당성’이나 ‘신묘한 전술’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우리가 얼마나 대중을 조직하고 대중을 투쟁의 현장으로 나오게 할 수 있는지, 우리가 급변하는 혁명적 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을 어떻게 구축하였는지, 우리가 혁명 세력 안에서 어떠한 영향력을 확보하였는지에 따라 이 계급전쟁의 승패는 결정될 것이다.

또한 혁명은 단일한 사건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혁명은 정권을 하루아침에 뒤엎는 쿠데타 따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혁명은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지배의 구조, 사람들 사이의 위계와 복종의 관계, 착취와 소외의 그물망을 하나하나 끊어내는 장기적이고 다면적인 싸움이다. 사회혁명은 ‘하나의 사건’이나 ‘개쩌는 반란’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복합적이며 때로는 지리멸렬한 혁명적 실천의 과정’이다.

 우리가 계급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날부터, 크로포트킨이 말했던 것처럼, “혁명의 다음 날 아침부터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빵을 나누는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무너진 체제의 잔해 위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우리만의 사회적 대안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그 대안으로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를 제시한다.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

우리가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를 제시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타도 뿐 아니라 국가권력을 포함한 모든 위계적 권력 구조, 다시 말해 인간 사이의 조직화된 지배 관계 전반을 철폐하고 타도함으로써, 해방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을 그 중심 목표로 삼는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생산수단의 국유화나 임노동의 폐지와 같은 경제적 목표를 넘어,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전 영역에서 작동하는 구조적 억압의 전면적 해체를 지향한다.

공산주의는, 이 입장에서 볼 때, 단순한 경제 시스템의 전환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피지배계급 전체가 자기 삶의 모든 영역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사회, 다시 말해 생산·재생산·문화·정치의 각 영역에서 자율적이고 평등한 주도권을 행사하는 해방된 사회를 의미한다. 공산주의가 자유의지주의적이라는 것은 개개인이 노동계급이나 코뮌의 일원일 뿐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필요, 삶의 형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여야함을 의미한다. 결국 우리의 혁명 역시, 누군가의 지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모든 개인, 대중의 자기해방혁명이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대신 권력을 잡아주고, 누군가가 대신 해방을 가져다준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해방이 아니라 단순한 지배자의 교체일 뿐이다. 역성혁명이 그랬고, 러시아 혁명이 그랬다. 왕의 성씨가 바뀌었을 뿐, 볼셰비키의 이름이 권력의 정점에 새겨졌을 뿐, 대중은 여전히 복종을 강요받았다.

우리가 말하는 혁명은 이와 다르다. 혁명은 피억압자가 스스로 봉기하고, 스스로 조직하고, 스스로 권력을 무너뜨리는 과정이다. 그 과정 속에서만 대중은 더 이상 지배의 객체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 외부에서 내려온 해방은 해방이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권력의 이름일 뿐이다

대중의 자기해방은 선언적 이상이 아니라 필연이다. 왜냐하면 억압은 단일한 제도가 아니라 삶의 모든 관계에 스며든 구조이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공장을 장악한다 하더라도, 가정 안에서 가부장제가 유지된다면, 그것은 권력의 주체가 교체된 것일 뿐 권력관계 자체가 해체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혁명은 반드시 모든 영역에서의 자기해방이어야 한다.

혁명의 방법은 혁명의 내용을 결정한다. 대중 스스로가 싸우고, 조직하고, 결정을 내리는 과정 속에서만 새로운 사회의 형태가 단련된다. 지도부가 내려준 해방은 위로부터의 통치로 귀결되지만, 대중이 스스로 쟁취한 해방은 아래로부터의 자치로 귀결된다. 혁명은 ‘대리’될 수 없으며, 오직 자기해방으로만 완성된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바, 계급적 지배의 구조는 전통적 의미의 계급 구조, 즉,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자본주의적 지배에 국한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본과 노동의 관계만이 아니라, 젠더 위계, 섹슈얼리티 규범, 인종적 우월성, 국적과 시민권을 매개로 한 배제의 장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장애 차별, 문화적 동질성 강요 등 다층적이고 교차적인 억압의 장치들 모두가 만들어내는 모순들의 총체가 우리가 이야기하는 계급적 지배의 구조다. 설혹 임노동제를 철폐하고 생산수단을 공유한다 하더라도, MTF 레즈비언 여성 베트남인 장애 노동자는 해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적 권력들은 상호 독립적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보완하며 체제의 안정성과 지속 가능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얽혀 있다. 따라서 특정 부문에서의 개량적 변화나 국지적 개혁으로는 체제 자체에 결정적인 균열을 가할 수 없다. 그렇기에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는 모든 지배 관계의 전면적이고 동시적인 해체를 요구한다.

이와 같은 사회는 단일한 형태로 고정되지 않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다. 생산 현장에서의 민주적 통제가 실현되는 모습일 수도 있고, 성소수자가 사회적 낙인과 배제 없이 존엄하게 살아가는 조건일 수도 있으며, 이주민이 국적이나 법적 지위에 의존하지 않고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구조일 수도 있다.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는 하나의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지배 없는 관계와 삶의 형태를 구성해 나가는 지속적인 실천이다. 이는 단순한 권력교체나 정책의 전환이 아니라, 사회 구조 전반의 전면적 재편을 의미하며, 해방을 선언하는 동시에 그 조건을 물질적으로 창출해가는 과정이다.

모든 개인의 해방

엠마 골드만은 “내가 춤추지 못한다면 혁명이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결국 제 아무리 세상의 형태가 바뀐다 하더라도, 그 세상에서 나에게 불편함이 있다면 그것은 해방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권이 교체되고, 총파업의 물결이 사회를 뒤덮고, 사업장에 노동자 자주경영이 도입되고, 어쨌든 세상이 바뀌면 무엇 하겠는가. “나”에게 적용되는 억압이 남아있다면, “나”는 여전히 춤출 수 없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나”에게 혁명과 해방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세상은 누구도 <나를> 지배하지 않는 세상, <내가> 타고난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우리의 이익”이나 “공동선”이나 “계급 이익”과 같은 것들이 달성된 세상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가 원하는 “혁명” 역시 이것과 같다. 우리의 혁명은 모든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달성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인간의 개별성을 착취와 억압의 체계, 사회적 규범이라는 족쇄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다. 억압적 권력과 강제적 규율이 파괴된 공동체 속에서, 각 개인이 자신의 욕망, 감정, 창조적 충동을 자유롭게 펼치며 공동의 삶에 기여하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아나키즘은 “나”에 대한 사상, “나”와 “너”의 관계에 대한 사상이 되어야 한다. “나”의 개별성에 관한 사상이며, “나”의 행복을 최대한 추구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이데올로기여야 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신앙과 교리도, 도덕과 법률도, 대중의 관심도 아니다. “나”가, 내 옆에 있는 또 다른 “나” (일반적으로 이는 “너”라고 불린다) 와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관계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당연한 듯 따라오는 비관론이 있다. 이를테면 개인의 이기심은 무한하기에, 개인의 욕망을 자유롭게 풀어준다면 파멸만이 남을 뿐이라는 소위 ‘호모 이코노미쿠스’적 비판이 그 하나라 하겠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그것이 아님을 반증하고 있다. 크로포트킨은 <상호 부조 : 진화의 요인>에서 하등 동물로부터 인류에 이르기까지 공동체를 분석하면서 ‘서로 돕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였음을 밝혔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자발적으로 언제라도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수 있다. 그것이 더 큰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기심은 ‘무한’하다고 말하는 ‘주류 경제학’에서조차, ‘한계효용은 체감’함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기에 어느 순간, 자신의 욕망을 발현하는 것이 ‘공동체의 붕괴’라는 비용을 낳을 때, ‘경제적 인간’은 욕망을 멈출 것이다.

이는 결국, 인간이 자신의 개별성, 혹은 개인적 욕망을 최대한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공동체적으로 행동하게 됨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코뮌은 신성불가침하고 선하신 것이 아니라, 에고이스트적 인간의 공동체인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은 홀로 생존할 수 없다. 오롯한 개인은 자연을 이겨내지 못한다. 오롯한 개인은 홀로 생산할 수 없다. 오롯한 개인은 번식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함께하기를 선택한다. 그 선택의 과정에서 자신의 개별성이 일부 손실된다 하더라도 그 손실의 크기가 이득의 크기보다 작은 한, 그 대의에 복무하기를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그 복무를 자율적으로 결정하게 한다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개인의 해방”의 본질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개인의 해방”, 혹은 “나의 해방”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곧 “모든 인민의 해방”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자명하다. 모든 인민이 자유롭지 아니한 세상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 아무리 더 나은 삶을 누린다 해도, 그 더 나은 삶이 ‘다른 누군가’의 억압 위에 세워진다면, 그것은 단지 계급의 상승이지, 계급의 철폐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더 본질적으로, 우리의 삶이 타인에 대한 착취에 의존하여 성립한다면, 그 삶은 결코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자유로운 삶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국가와 자본, 산업이라는 체제로부터 몸을 빼내어 산 속에 오두막을 짓고 텃밭을 일구며 자급자족적인 삶을 누리는 개인을 상상해보자. 이 자는 국가의 규제에 구애받지 않고,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삶을 독립적인 삶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그의 자유로운 삶은 오두막을 지을 원자재를 생산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에 의존한다. 이 노동자들의 사용자가 원자재 가격을 올리는 순간 그의 자유로운 삶은 시작될 수 없다. 그의 독립성은 텃밭을 일굴 농기구를 만들고, 텃밭에 심을 종자를 길러내는 이들에게 의존한다. 지주가 더 이상 농사를 짓지 말고 그 농토에 양을 기르라고 얘기하는 순간, 그의 텃밭은 사라진다.

모든 인민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억압에서 눈을 돌리고, “나의 해방”만을 이야기할 때, “나”는 해방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억압의 체계에 대한 모든 피억압대중의 총체적 반란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반란을 성립하도록 하기 위한 전술적 · 전략적 실천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반란의 결과로만, 내가 스스로를 해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분석

사회의 구조분석

권력/폭력

‘힘’은 단순히 물리적인 힘만이 아니라, 사회의 각 층위에서 발생한다. 각 개인, 혹은 집단이 가지는 ‘힘’은 다른 이의 ‘힘’과 서로 다를 수 있으며, 이는 온전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로부터 권위가 발생한다. 바쿠닌이 <신과 국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권위는 전문성, 지식, 경험 등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고,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자연스럽지 않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권위도 있다. 그것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단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 특정한 성기의 형태를 가졌다는 이유, 특정한 피부색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부여되는 권위등이다. 이 권위들은 자연스러운 관계나 상호 존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지배계급이 스스로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고 유지해온 권위들이다. 생산수단의 소유는 노동의 분업과 협력이라는 자연스러운 질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성별과 인종은 공동체의 존립을 위한 상호의존의 필요에서 비롯된 권위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권위들은 자연의 법칙인 양, 불변의 질서인 양 강요된다.

그리고 권위를 바탕으로 타인에게 특정한 행동을 강제하는 행위를 우리는 폭력이라고 정의한다. 그 권위가 자연스러운 권위이건, 인공적인 권위이건, 그것을 폭력적으로 활용하는 순간 지배권력이 발생한다. 나이와 경험의 차이에서 권위가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 권위를 바탕으로 요즘 젊은 것들을 탓하고 예의범절을 요구하는 순간, 그것은 꼰대 권력이 된다. 생산수단의 소유여부로 무산계급에게 고강도 장시간 저임금노동을 강요하거나, 성기의 모양새를 바탕으로 특정 성별에게 차별과 혐오를 발하는 것이 자본/젠더 권력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지배권력의 철폐를 추구한다. 힘의 우위에 따라 개인이 스스로의 욕망에 반하는 행동을 강제받는 것은 우리가 목적하는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 사회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폭력’ 일반을 반대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현존 체제를 파괴하고, 유산계급에게 ‘그들이 원하지 않는’ 해방을 강제하는 ‘폭력혁명’을 지향한다. 우리의 ‘수적 우위’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힘의 우위를 이용하여 다수의 피지배계급이 소수 지배계급의 의사에 반하여 착취와 억압의 계급구조를 끊어내야 한다고 믿는다.

각종 지배권력구조

우리가 바라보는 주요한 지배권력의 구조는 아래와 같다.

자본주의

① 자본주의의 모순

인간,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은 생산물을 이용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 그렇기에 인류 문명에 있어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얼마나 분배할 것인가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사회적 문제였다. 그리고 그 생산은 흔히 토지, 자본, 노동, 기술 등으로 구분되는 생산 요소의 융합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생산의 과정에서 위계적 우위를 점한 것은 생산 요소 중 비인간적 요소, 혹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들이었다. 현대 산업자본주의는 물론, 노예제 사회가 되었건, 봉건제 사회가 되었건 노예와 농노의 노동력이 없다면 토지와 공장만으로 생산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을 하는 이들이 아닌, 그 생산수단을 소유한 이들이 계급적 우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그 생산수단을 자본가계급이 소유하고 있는 사회이며, 그렇기에 이 체제를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위계상 우위를 바탕으로 자본가계급-노동계급 사이에 권력상 우열이 나타난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이들, 혹은 자본가계급은 그 소유를 근거로  노동과정 전반을 통제한다. 그리고 현존 체제는 이 통제에 대한 권리를 경영권이라는 이름으로 신성화한다.

그리고 경영권의 행사는 노동계급, 혹은 노동자 일반에게 일상적인 폭력으로 다가온다.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결정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본가의 재량이다. 노동자를 채용하고 해고하는 것 역시 자본가의 재량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이라는 생산요소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려 한다 해도 (노동조합을 통한 단체교섭/단체행동) 노조법은 노동조합이 ‘경영권’에 대해서는 교섭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위계-지배권력의 형성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자본가는 어떠한 공장도, 기계도 직접 만들지 않았다. 공장은 공장을 건설하는 건설노동, 공장까지 가는 도로를 건설해온 수천년간의 사회적 노동, 공장 주변의 토지를 가꾸어온 농업노동 등의 결합물이다. 기계는 각 부품을 생산하는 생산노동, 해당 기계 제작까지 수천년간 이어져온 사회적 기술혁신, 기계를 공장까지 운송하는 운수노동 등의 결합물이다. 설혹 자본가 하나가 공장의 설계나 기계의 작동에 있어 일정부분 혁신적 아이디어를 더했다 하더라도, 이는 사회 전체가 만들어온 기술적 진보의 단말일 뿐, 그것이 그 자본가가 생산과정에서 권력적 우위를 점하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 과정의 통제권을 자본가가 가진다는 것이 우리가 바라보는 자본주의의 모순 중 첫번째다.

나아가, 자본가 계급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였다는 단 하나의 근거로, 생산물의 분배에 대한 권리 역시 전유하여 독점한다.

앞서 말하였듯, 생산은 다종다양한 생산수단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아무 밥집이나 들어가서 공기밥 한 공기를 시킨다고 해도, 그 공기밥에는 중국의 쌀농민과, 베트남 스테인리스 식기 제작 노동자와, 그것들을 한국으로 운송하는 필리핀 선사들과, 한국에서 도매상으로 운송하는 화물노동자와, 식당에서 그 밥을 하는 조선족 노동자의 노동이 들어가 있다. 그런데 왜 공기밥 한 공기를 얼마에 판매할지, 누구를 대상으로 판매할지, 그 판매하여 남은 이득을 어떻게 사용할지가 오롯이 밥집 사장의 권한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우리가 바라보는 자본주의의 모순 중 그 두번째다.

② 자본주의는 영속가능한가

농업사회로부터 상업사회, 나아가 산업사회로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자본주의는 계속하여 새로운 논리를 발전해나가며 전개되어 왔다. 프랑스 혁명기의 자본주의는 그 혁명을 이끈 부르주아들의 핵심 이념이자 절대왕정에 맞선 개인의 해방적 이념으로서 활용되었다. 절대왕정의 통제적 중상주의에 맞선 자유로운 자본주의는, 개인에 의해 주도되는 자유로운 시장질서라는 것을 주창하며, 이를 혁명적으로 변용한 것이었다. 이 과정 속에서 그에 질문과 의문을 가한 혁명가들과 대중은 존재했으나, 그들은 역사의 주류가 되지 못하고 집권에 성공하게 된 혁명의 주류세력들, 즉, 부르주아들에 의해 찍어 눌려졌다.

뒤이어 동시기에 태동하기 시작했던 산업혁명은 자유로운 시장질서와 맞물려 새로운 신화를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생산량과 그 효율성은 그들이 주창했던 자유시장, 산업자본주의의 승리 그 자체를 의미했고, 그 정당성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자본주의의, 혹은 자본주의 그 자체의 모순은 해결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 어떤 경우에도 생산과정과 생산물에 대한 통제권을 독점하고 있던 것은 자본가, 지배계급이었다, 터져나오는 모순을, 혁명적 분위기에서 터져나왔던 모순들을, 자본주의는, 체제는 수많은 신화를 창조해냄으로써 막아내고 숨겨왔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의 계급관계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아닌 것으로 이야기된다. 혁명적 이데올로기로써의 자본주의는 국왕과 절대왕정의 폭압에 맞선 해방의 상징이었다. 자유로운 개인과 개인 간의 계약으로 자유로이 부를 쌓아올린다는 테제는, 혁명적 분위기에서 터져나오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체제에 맞서는 대안으로써. 신화로서 자리잡도록 만들었다. 봉건적 사회질서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자본주의는 해방의 이데올로기로서 뿌리내리는 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자본주의는 그들 스스로의 모순을 결국 숨겨내지 못했다.

첫째, 경쟁과 경쟁에서 비롯된 끊임없는 성장과 발전이라는 전제가 붕괴되었다. 자유로운 개인과 개인 간의 경쟁, 그리고 이들이 모인 기업들의 발전은 기술의 발전을 이끌어내고 인류 전체의 발전과 진보로 이어진다는 주장은 자본주의를 지탱해온 신화였다. 그러나 이 신화가 붕괴되었다. 자본가들은 생산과정 속 자신이 낸 자본과 노동자의 노동을 결합해 나타난 부가가치에서, 노동자에게 지급해야 하는 임금을 뺀 만큼의 이윤을 가져간다. 자본가들이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선택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신화에 의하면 더 혁신적이고 효율적인 기술과 경영기법을 활용하여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해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더 손쉬운 방법을 선택했다. 바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자들에게 들이는 자본을 최소화함으로서 스스로의 이윤을 극대화했다. 자연스럽게, 이는 자본가가 노동자들에 대한 억압을 자행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둘째, 개인과 개인 간의 대등한 관계에 따른 계약이라는 테제가 붕괴되었다. 자본주의의 신화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하며, 대등한 개인 간의 계약 속에서 모두가 최대한의 이윤을 창출해낸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들은 생산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노동자들에게 의견을 묻지 않는다. 생산물에서 나타난 이윤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에 대해서 노동자들과 논의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고용하고 있는 자본가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결코 인상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생산수단을 소유한 이들이 결정하는 이런 관계는, 결코 평등하고 대등한 관계가 아니다. 생산관계에서의 이러한 모순은 더 이상 신화만으로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이 모순을, 정면으로 돌파하겠다고 나타난 이들은 자본주의의 개량 가능성을 열렬히 외친다. 이러한 모순은 수정이 가능하다며, 수정을 하는 데에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자본가들이 벌어들이는 이윤에서 더 높은 세금을 걷어들이고, 그 세금을 분배함으로서 모순에서 비롯된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도록 하면 된다는 논리이다. 이는 소위 자본주의의 개량 가능성을 열렬히 설파하는 사회민주주의자, 민주사회주의자들이 주창하며, 이것이 곧 사회주의, 라고 주장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들 중 그 어떤 이들도 그 ‘모순’의 근원을 주목하지 않는다. 결국에 생산하는 이들이 그 어떤 생산물과 생산과정에서의 통제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점에는, 그들 중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다. 아니, 주목하는 이들이 있다 할지언정, 이를 해결할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단지, 누더기처럼 덕지덕지 이어 이것으로 자본주의가 개혁되었노라 선언할 뿐이다. 자본주의가 개량이 불가능함이 결국 드러날 뿐이다.

가부장제

1. 가부장제의 정의

가부장제란, 성기의 형태, 젠더 수행성, 성적 정체성 등에 따라 권력의 분배가 결정되는 사회적 위계 질서를 말한다. 이 질서는 단지 문화적 관습이 아니라, 특정한 물질적 조건과 역사적 전개 속에서 출현하고 정착한 사회 구조적 장치다.

인류 문명이 성립한 이후, 고대의 이른바 ‘문명 사회’들은 노예노동에 기반한 생산양식을 채택하였다. 사회의 중심 과제는 노동력을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확보·동원할 수 있는가였고, 이는 곧 전쟁과 정복을 통한 노예 확보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육체적으로 강한 남성 전사가 핵심적인 생산수단이자 통치수단으로 부상하였다. 남성은 전사이자 지배자로, 여성은 가정 내에서 전사와 노동자를 ‘재생산’하는 존재로 위치 지어졌다. 가부장적 질서는 이같은 분업과 권력 배분의 논리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후 중세를 거쳐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 속에서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 노동의 효율성은 기계에 의해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신체적 차이가 생산력에서 갖는 의미는 점차 감소하였다.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버튼을 누르는 일에 있어, 남성과 여성의 성기의 형태는 아무런 실질적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는 해체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형태를 바꾸어 존속하고 있다. 여성의 임금 노동 참여가 보편화된 오늘날에도, 여성은 여전히 다음 세대의 노동력을 ‘출산’을 통해 재생산하라는 사회적 압력에 시달린다. 여성은 어떤 직업을 수행하든 간에, 가정에서는 ‘남성 노동자의 재충전’을 위한 가사노동과 정서노동을 수행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처럼 여성의 노동은 이중적 착취의 대상이 되며, 특히 가사노동은 비가시화되고 부차적인 것으로 격하된다. 가부장제는 바로 이러한 착취의 논리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구조적 장치다.

2. 가부장제라는 구조적 폭력

가부장제의 권력은 이성애자 시스젠더 남성에게 집중된다. 다시 말해, ‘남자다운 남자’, 또는 성적 행위의 위계에서 ‘삽입하는 자’는 ‘삽입당하는 자’에 대한 사회적 권력을 전유한다. 이 권력은 단지 상징적 지위의 차원이 아니라, 실질적인 자원·기회·안전·자율성의 분배에서 작동한다.

a. 성기의 모양에 따라 결정되는 권력

사람이 어떠한 성기를 가지고 태어나는지는 유전적으로 무작위의 영역에 속해 있다. 하지만 가부장제의 질서 아래에서 이 ‘의지와 무관하게 사전에 결정된’ 생물학적 성 차이는 사회적 위계로 전환된다. 이 구조는 성기의 모양에 따라 인간에게 권력을 배분한다. 음경을 가진 자는 '능동적 주체'로, 질을 가진 자는 '수동적 대상'으로 규정되며, 이 이분법은 단순한 생물학적 구분을 넘어 권력 질서의 근간이 된다.

여기서 권력은 단지 상징의 문제가 아니다. ‘삽입하는 자’는 정복자이며, 명령하는 자이고, 생산수단에 접근할 권리를 가진다. 반면 ‘삽입당하는 자’는 그 자체로 통제의 대상, 감시의 대상, 보호라는 이름의 억압을 받아야 할 존재로 취급된다. 이는 성적 행위에서의 권력관계뿐 아니라, 일상생활 전반에 내재된 지배-복종 구조를 정당화한다. 음경-강력한-이성적인-남자-인간은 질-나약한-감성적인-여자-인간에 비하여 더 ‘근대적 지배자’에 걸맞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남성에 대한 역차별’을 울부짖는 인터넷 커뮤니티 베댓들의 망상과는 달리, 한국의 노동환경은 여전히 여성에게 평등하지 않다. 여성의 노동은 여전히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노동현장에서의 관리자는 일반적으로 남성이 된다.

성폭력은 이 권위가 물리적 강제로 전환되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다.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은 여전히 일탈적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용인되는 권력 작동의 일부다. 가해자는 ‘본능’을 말하고, 피해자는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심받는다. 이는 단지 성욕의 문제가 아니다. 삽입하는 자가 권력을 갖고, 삽입당하는 자가 그 권력의 통제 아래 있다는 구조 자체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다.

이처럼, 가부장제는 자연스럽지 않은 권위를 성기의 형태에 따라 할당하고, 그 위에서 강제력을 정당화함으로써 권력을 구축한다. 이는 철저히 인공적이며 정치적인 질서다. 그럼에도 이 권력은 ‘자연의 법칙’처럼 포장되며, 불변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지도록 강요되고 있다.

b. 가부장적 권력의 재생산기제로서의 젠더이분법

가부장적 권력이 재생산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지배하고, 누군가는 지배당하는 메커니즘을 영속화하여야 한다. 그 메커니즘은 ‘젠더이분법’이라는 이름으로,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 자체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위계적 질서를 구축하고 정당화한다.

‘남성은 이성적이고 강하며, 여성은 감정적이고 연약하다’, ‘남성은 공적 공간의 주체이고, 여성은 사적 공간의 관리자다’. 이러한 이분법은 결코 자연스러운 분업이나 기능상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신체적 특징을 기반으로 사회적 역할을 고정시키는 폭력적 서사이며, 동시에 이 서사를 받아들이도록 사회화하는 교육·문화·제도적 장치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경계를 유지하려는 집단적 집착은 단순한 문화 현상이 아니다. 이는 가부장적 권력이 자신을 재생산하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이데올로기적 전제다. 다시 말해, 권력이 영속되기 위해서는 성별 구분이 분명해야 하고, 각 구분에 고정된 역할과 속성을 할당해야 한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라는 강요된 형상은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며, 개인이 이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조롱, 억압, 폭력의 대상이 된다.

예컨대, 남성은 울어서는 안 되고, 여성은 목소리를 높여서는 안 된다. 남성은 ‘국가를 지키는 군인’이 되어야 하며, 여성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 이 서사는 젠더를 사회적 기술로 변형하여, 인간을 노동력·재생산력·국가동원력으로 분할한다. 다시 말해, 젠더 이분법은 단순히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과 국가, 가부장제가 인간의 몸을 관리하고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효율적 기계장치다.

젠더 이분법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가공하고 통제하기 위한 권력적 픽션이다. 성기 모양의 차이로 만들어지는 권력을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라는 단어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c. 성억압, 성엄숙주의

이 사회는 우리에게 욕망하라고 명령한다. 광고는 섹스어필로 넘쳐나고, TV와 인터넷은 사랑과 섹스를 소비하게 만든다. 모텔촌은 쇠락한 지역경제의 마지막 버팀목이고, 피임약과 콘돔 시장은 연일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정부는 출산율을 걱정하며 단체 미팅을 후원하고, ‘결혼을 장려하는’ 국가주의적 캠페인은 매해 업데이트된다. 요컨대 우리는 욕망을 부추김당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욕망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 여성은 순결해야 하고, 남성은 섹스를 해도 가정에 충실해야 하며, 퀴어한 욕망은 침묵해야 하고, 트랜스의 존재는 불편하니 안 보이는 곳으로 밀려나야 한다. 섹스는 있어야 하지만, 말해선 안 되고, 보여줘야 하지만, 직접 해서는 안 된다. 부추겨진 욕망은 검열당하고, 그 모순을 개인이 감당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억압의 구조다. 욕망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욕망을 계급화하고 위계화하여 통제하는 방식. 남성의 욕망은 '본능'이 되며, 여성의 욕망은 '문란함'이 된다. 여성은 ‘언젠가 엄마가 될 소중한 몸’으로 규정되고, 자위는 조심스럽게 '적당히 하라'고 교육된다. 이성애 외의 욕망은 병리화되거나 외설로 격하된다. 우리는 ‘정상위로만 해야 하는 성’을 배웠고, 사랑 없는 성은 죄악이며, 섹스는 곧 임신과 파멸이라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이 억압은 결코 도덕적 퇴행의 문제가 아니다. 성억압은 통치다. 빌헬름 라이히가 말했듯, 권위주의 체제는 욕망을 억압함으로써 복종을 유도한다. 히틀러는 ‘퇴폐미술’을 조롱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안일·방탕한’ 존재를 적대계층으로 분류하며, 군사정권은 ‘국풍’이란 이름으로 성을 통제했다.

여기에 성엄숙주의가 결합한다. 성은 사랑 (혹은 번식) 을 전제로만 허용되어야 한다. 여성은 혼전 성관계를 하면 ‘자존감이 낮은 여자’가 되고, 남성은 다 해도 되지만 ‘결국은 가정을 책임질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이중기준은 단지 보수적인 가치관이 아니다. 이것은 성적 권위의 구조화이며, 가부장제-자본주의 체제의 자기보존 장치다.

현대의 반성폭력 운동조차 이 권위에 포섭된다. 여성은 ‘피해자’로 정체되고, 욕망하는 여성은 다시 ‘문란하다’고 지적된다. 성적 표현은 ‘언어 성폭력’이라는 말로 봉쇄되고, 표현의 자유는 도덕적 감수성에 저당잡힌다. 이로써 성폭력은 권력의 문제에서 도덕의 문제로 치환되고, 구조는 은폐된다.

그러나 우리는 성폭력을 ‘나쁜 남자’의 일탈로 보지 않는다. 성폭력은 권력의 문제다. 그것은 ‘누가 욕망할 수 있고, 누가 욕망의 대상이 되는가’에 대한 체계적인 계급화의 산물이다. 가부장제가 성기의 모양에 따라 권위를 부여하고, 성행위를 위계화하는 한, 성폭력은 필연적이다. 우리는 남성의 윤리 개조가 아니라, 권위 그 자체의 철폐를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한다. 가부장제를 철폐하지 않고는, 자유연애는 불가능하다. 성 해방은 도덕적 이상이 아니라, 권력 없는 관계의 회복을 뜻한다. 우리는 성적 쾌락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적 권위의 종말을 말한다. 성폭력을 없애는 길은, 욕망을 죄악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권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3. 성해방

우리는 성차별의 완화나 시혜적 평등의 시늉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성의 해방이다. 여성도 일할 수 있고, 군대에 갈 수 있고, 남성도 육아휴직을 쓸 수 있다는 식의 성역할 교환은 체제의 근간을 뒤흔들지 않는다. 성기, 젠더, 섹슈얼리티를 권력 배분의 기준으로 삼는 이 사회에서, 단지 ‘차별을 없애는 것’만으로는 욕망을 억압하는 구조를 건드릴 수 없다.

우리는 권위 그 자체를 해체하려 한다. 가부장제는 욕망을 계급화하고, 성적 행위를 위계화하며, 누구의 쾌락이 허용되고 누구의 존재가 비가시화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이 체제에서 성은 정치다. 우리는 이 정치가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은 자유로워야 하고, 욕망은 권력에 복속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평등한 남성과 여성’의 사회가 아니라, 권력이 개입할 수 없는 관계, 위계가 사라진 욕망, 성적 권위가 철폐된 세계다.

한민족주의와 제국주의

한국 민족주의는 단순한 정체성의 표현이 아니다. 이는 오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권력의 기제다. 지정학적으로 한국은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있었고, 이러한 외세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를 중심으로 인민이 뭉치는 방식의 중앙집권 체제가 매우 이른 시기부터 자리 잡았다. 생존은 곧 국가 중심의 통합과 질서로 이어졌고, 이 통합은 곧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기반이 되었다. 민족주의는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수단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억압적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의 경험은 민족주의에 도덕적 당위성을 부여했다. 타국을 침략한 적이 없으며 (이종무에게 침략당한 대마도 해적들에게도 그 의견을 물어보면 좋겠다), 식민지를 경영한 적도 없다는 (4군6진에 살아가던 선량한 여진족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선량한 민족’의 서사는 한국 민족주의를 윤리적 무결성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이 피해자적 정체성은 구성원들에게 충성과 일체화를 강요하는 내부 통치 수단으로 기능할 뿐 아니라, 바깥 세계에 대해서는 한국 자본의 팽창을 정당화하는 외교적 서사로 활용된다.

한국은 식민지를 경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앞세워, 개발도상국들에 자본을 수출하고 착취적 관계를 맺으면서도 이를 도덕적으로 무해하다고 포장한다. 이 자본은 해외 원조는 물론, 건설, K-컬처, K-기술, K-방산 등의 이름으로 진입하며, 현지의 인력과 자원을 흡수하는 구조를 만든다. 과거의 식민주의가 군대와 깃발을 앞세웠다면, 오늘날 한국의 제국주의는 민족의 피해서사와 자본의 선량함이라는 위선적인 정당성을 앞세운다. “우리는 일본과는 다르다”는 문장은, 일본과 똑같은 일을 하되, 다른 가면을 쓴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교묘하고 폭력적이다.

이는 통일 담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통일은 대박’, ‘북한의 자원과 인력 + 남한의 자본과 기술력’이라는 구호는 통일을 자본의 기회로, 북한을 경제적 식민지로 삼는 계획으로 바꿔 놓는다. 통일이란 이름 아래 하나되는 것은 바로 국가다. 인민이 해방되는 것이 아니다. 통일된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단지 하나의 더 강력한 중앙권력이 존재한다는 뜻이며, 그 안에서 자본은 더욱 자유롭게 착취하고, 국가는 더욱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이러한 자본주의적 관점을 벗어나, 피억압민족의 해방운동으로서 조국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언가 다른 정당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런 민족주의적 흐름은 ‘통일’을 하나의 신성한 과제로 추상화하고, 그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또 다른 국가주의, 중앙집권주의, 권위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문제는, 이것이 해방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강제된 동질성’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민족해방운동이 만들어낼 ‘통일조국’이 남한의 군사주의, 자본주의 질서뿐 아니라 북한의 국가주의적 억압까지 포괄하여 양 체제의 권력 구조를 비판 없이 ‘통합’한다면, 이 통일조국에서서 피억압자의 자기결정권은 민족국가의 재구성 아래 종속될 뿐인 것이다.

이는 결국, 민족주의라는 도덕적 준거를 활용하여 내부와 외부 모두를 통제하는 구조를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일은 해방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구조의 확장일 뿐이며, 경제적 제국주의의 새로운 국가적 계획일 뿐이다. 우리는 이 민족주의에 어떤 감정도, 의무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인공적 권위이며, 그것이 폭력으로 작동하는 한 우리는 그것을 권력으로 간주하고 거부한다. 동시에 모든 종류의 민족주의는 그렇게 작용한다.

민족주의는 더 이상 해방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도덕의 영역에서 작동되는 억압의 언어이며, 자본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제국주의의 담론이다. 오늘날 민족주의는 외세의 억압으로부터 대중을 보호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국 자본이 세계의 대중을 착취하는 정당화 기제가 된다. 우리는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조직된 어떤 통합도, 통일도, 지배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가 지향하는 세계는 민족이 아닌 인간을, 국가가 아닌 공동체를, 권위가 아닌 자율을 중심에 둔 세계다. 그 어떤 피해자적 역사도, 도덕적 정당성도, 자본의 선량함도 이 억압을 정당화할 수 없다. 민족주의는 해방이 아닌, 또 하나의 폭력이다.

도덕주의

도덕은 인간 공동체의 공존을 위한 윤리적 감각에서 비롯한다. 상호 신뢰, 존중, 책임감을 형성하며,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합의된 기준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도덕이 절대화되고 고정된 규범이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자유의 표현이 아니라 통제와 강제를 위한 체계가 된다. 우리는 이 지점을 ‘도덕주의’라고 부른다.

도덕주의는 단순한 가치 판단의 틀을 넘어, 독립된 하나의 권력구조로서 작동한다. 도덕주의는 법도 아니고, 경제적 이해도 아니며, 물리적 강제도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을 움직이고, 통제하며, 벌주고 복종시키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 힘은 물리적 폭력이 아닌 정신적 폭력, 죄의식과 수치심, 도덕적 낙인의 형태로 행사된다. 누구도 그것을 ‘폭력’이라 부르지 않지만, 수많은 개인들이 자신의 욕망과 삶을 스스로 검열하고 억압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권력의, 폭력력의 가장 세련된 형태다.

도덕주의는 가난한 사람을 ‘노력하지 않은 자’로 낙인찍고, 성적 자유를 ‘문란함’으로 치환하며, 이견을 가진 사람을 ‘비윤리적’이라 몰아붙이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통제한다. 도덕주의는 법보다 앞서 사람을 유죄로 만들고, 폭력보다 깊숙이 삶을 구속한다.

이 권력은 눈에 보이지 않고, 감옥도 군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의 내면에 깃든 규범적 양심을 통해 스스로를 복제한다. 사람들은 자기 삶의 방식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자신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억누르며, 다른 사람을 감시하고 판단한다. 도덕주의는 외부의 권력이 아니라 내면화된 권위이며, 바로 그 점에서 가장 강력하고 질긴 통제 장치가 된다.

그렇게 도덕주의는 그 어떤 이념에도 구속되지 않고, 그 자체로 모든 삶의 형태에 개입한다. 그것은 교육, 종교, 언론, 공동체, 심지어 ‘진보적’이라 자처하는 운동 안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모두를 위한 정의, 모두의 안전, 공동체의 도덕성 같은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는 끊임없이 침해당한다. 타인의 ‘도덕’을 위반하는 순간, 우리는 비난받고 고립되고 침묵을 강요당한다.

우리는 도덕 없는 사회를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도덕이 권력이 되는 사회를 부정한다. 욕망의 다양성이 도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윤리도 시작된다. 그 윤리는 복종이 아닌 연대를, 낙인이 아닌 이해를, 규율이 아닌 자율을 바탕으로 할 것이다.

군국주의/병영문화

군국주의와 병영문화는 과거부터 언제나 한국사회 기저를 지배하고 있었다. 국가는 징병제를 유지하며 여전히 모든 남성 청년을 군사적 통제의 대상으로 삼고 있고, 사회는 병역 수행 여부를 기준으로 청년을 분류하고 차별한다. 이는 병역이 단순한 국방 의무를 넘어, 국가에 복무한 자만이 온전한 '시민 자격'을 획득하는 통과의례처럼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대는 여전히 위계질서와 복종을 미덕으로 삼고, 상명하복의 구조는 일상적 언어와 행동 속에 그대로 살아 있다. 복무기간 동안 병사들은 스스로를 검열하고, 상급자의 눈치를 보며, 인격을 보류한 채 존재해야 한다. ‘가스라이팅’과 ‘집단 따돌림’은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계속되며, 이를 견디지 못한 병사들의 극단적 선택도 끊이지 않는다. 이 모든 현상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병영이라는 이름으로 구성한 체제가 낳은 구조적 폭력이다.

뿐만 아니라, 군국주의는 병영의 바깥으로도 뻗어나간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여전히 안보를 이유로 국가 권력을 강화하고 정치적 반대자를 비애국자로 낙인찍는 일을 끝없이 바라보고 있다. 전쟁 위협은 국가 권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며, 국방예산은 지속적으로 증대되고, 병사 수 감소를 보완한다는 명목으로 첨단 무기체계 도입과 국방산업 확대가 정당화된다. 그렇게 군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는 개념은 반복된다.

병영문화는 또한 사회적 권력 관계의 축소판으로 작동한다. 군대는 명백히 남성 중심적인 공간이며, 그 안의 위계질서와 권위주의는 가부장적 질서와 직결된다. 징병제가 남성에게만 부과되는 현실은 성별 간 권력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이를 통해 남성 우월주의적 인식을 정당화하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군대 갔다 왔냐’는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경험의 위계를 통해 권위를 주장하려는 문화적 폭력으로 기능한다. 군 복무 유무는 남성들 사이의 위계를 나누고, 여성에게는 참여 불가능한 권위의 서열을 형성한다.

대한민국은 스스로 민주주의 국가임을 표방함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가치가 시민적 가치 위에 놓여 있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병영은 여전히 권위의 상징이며, 군국주의는 여전히 국가 정체성의 중심이다. 이 권력 구조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한 인간관계를 파괴하며, 국가가 인공적으로 구성한 권위에 개인이 복종하도록 강제한다.

군국주의와 병영문화는 무언가 개선해서 해결될 문제가 결코 아니다. 이는 철저히 해체해야만 한다. 수많은 다른 권력구조들에 의해 떠받들어짐과 동시에 그 스스로를 다른 권력구조를 떠받들기 위해 존재하는 구조는, 개혁되어서는 언제나 그랬듯 다시 원상복귀 될 뿐이다. 이것으로부터의 총체적 해방과 해체만이 있어야 한다.


계급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은 억압자와 피억압자로 나뉜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이 두 계급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 놓여있다. 이 투쟁을 막거나 완화해야 할 것으로 인식하여 제도와 법률을 통해 피억압대중의 처우를 개선하고자 하는 개량주의자들이건, 이 투쟁이 필연적이라 바라보아 그 투쟁에서 피억압대중에 동참하여 계급구조를 무너트리고자 하는 혁명주의자들이건, 사회의 변혁이라는 것을 꿈꾼다면 계급론 그 자체는 고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같은 시점, 같은 장소에서, 피억압대중은 언제나 피억압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는가.

이를테면 마르크스주의의, 소위 “유물론적 사회인식”에서는 그러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모든 사회적 억압관계는 오롯이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에서 비롯한다. 가부장제도 그러하다. 모든 유산계급 여성의 “여성성”은 무산계급에 대한 착취에서 비롯한다. 이성애 중심주의도 마찬가지다. 비이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억압은, 노동력의 재생산을 필요로 하는 자본의 필요에 의하여 창출된 것이다. 세대 간의 갈등도, 인종(민족)에 대한 차별도, 국가의 인민에 대한 탄압도, 자본이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억압구조들이 된다. 이 모든 억압구조에서, 결국 무산계급은 언제나 유산계급에 대하여 피억압자의 위치에 놓인다.

이는 비단 마르크스주의에 국한한 이야기가 아니다.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를 “성기의 모양새”로 치환하여 본질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페미니즘에서도, 여성은 언제나 남성에 대하여 억압-피억압 관계의 열위에 놓인다. 흑표당 부류의 “흑인” 사회주의에서 흑인이 백인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이들 사상조류는 서로 다르고, 서로 투쟁하지만, 관점을 돌려놓고 보면 그 형태는 유사하다. 이들은 사회적 억압의 체계를 분석할 때, 그 억압과 모순이 하나의 준거에 “주되게” 근거하여 발생한다고 바라본다. 이는 결국 다른 준거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두게 되는 것으로 귀결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현실은 이처럼 단순하게 주와 부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LG트윈타워의 청소노동자들을 해고한 용역업체 ‘지수아이앤씨’의 사장들이었던 구훤미, 구미정은 청소노동자들의 피땀으로 자산을 불리고, 청소노동자들을 해고한 악질 자본가다. 하지만 동시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LG그룹의 후계구도에서 배제되어 ‘양자’인 구광모에게 승계권을 빼앗긴 가부장제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버락 오바마는 미 제국주의의 수장으로서 제국주의적 침략과 수탈의 총지휘자였지만, 도널드 트럼프에게 케냐에서 태어난 것 아니냐며 출생증명서 제출을 요구받고, 북괴 정부로부터 “동물원 원숭이”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던 인종차별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먼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도, 단지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기만 해보자. 업무 중, 혹은 노사 교섭 석상에서 그 누구보다 악독하게 노동자들을 몰아세우는 여성 사장(혹은 관리자)이, 남성 노동자들의 술자리에서 성희롱의 대상이 되는 모습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한 장면일 뿐, 특수한 경우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자본가에 대한 노동계급의 반발과 저항 심리의 표출”이라거나, “가부장적 위계의 역전에 저항하는 남성 기득권”이라고 단순하게 바라볼 수 없다. 소유관계에서의 권력위계만을 철폐하거나, 가부장적 젠더 억압을 철폐하는 것만으로는 결국 “해방되지 못한 누군가”를 남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 연대>의 이전『강령』은 “우리는 혁명은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바라본다. 자본주의의 일부, 혹은 가장 핵심적인 일부인 임노동제와 사적소유가 철폐된다 하더라도, 베트남인 MTF 레즈비언 여성 노동자는 온전히 해방될 수 없”으리라고 언명하였던 것이다.

즉, 우리는 현대의 국가를 단순한 ‘부르주아 국가’로 바라보지 않는다. 우리에게 현대 국가는 자본주의 · 가부장제 · 이성애 중심주의 · 민족주의 · 인종주의 · 제국주의 · 군국주의 국가다. 이러한 모든 억압의 체계가 서로가 서로와 교차하며 떠받치고 있는 권위의 체계가 우리가 바라보는 바, 현대의 국가 - 사회다. 잘 짜여진 천을 상상해보자. 천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실은 때로는 다른 실의 위에 놓이고, 때로는 아래에 놓이면서 얽혀있다. 그리고 이렇게 얽혀진 천은 하나의 실이 감당할 수 없는 압력을 버텨낼 만큼 공고한 내구도를 가지게 된다. 현대의 국가 - 사회 역시 이와 같이, 다종다양한 억압기제들이 복합적으로 교차하는 것으로 지배계급을 떠받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다수의 인민은 특정한 위치에서 피억압자이면서 동시에 같은 위치에서 억압자가 된다. 대공장의 남성 노동자들은 자본에 의해 쉼없는 연장/야간 저임금 노동으로 내몰리며 죽어가는 동시에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 아래에서 ‘여성’ ‘비정규직’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노동을 부차화하는 젠더 억압기제의 억압자가 된다. 트랜스젠더 직업군인에게 전역을 강제하는 것은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폭력적 억압이지만, 그가 되고 싶어하던 “당당한 여군”은 어디까지나 군국주의라는 국가의 폭력기제에서 억압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각양각색의 억압기제들은, 서로를 지지하고 떠받힌다. 제국주의는 인종주의와 민족주의가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타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탈이 없이 국제자본주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의 가사노동을 착취하는 것으로, 자본가에게 착취당할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한다. 이러한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된 “정상가족”의 이데올로기는 이성애 중심주의적 억압-피억압 관계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피억압대중을 때때로 억압자의 위치에 놓아주면서, 체제는 그 무엇보다도 공고한 기반을 갖추게 된다. 대중의 지지가 그것이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상대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외주화를 지지한다. 남성들은 가부장적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여성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지지한다.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의 가격(임금)을 지키기 위하여 이주노동을 배척하는 정주노동자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계산이 작동한다. 체제가 제공하는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체제의 억압에 순응하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판단한다면, 인민들은 결국 체제에 복무하여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단순히 ‘반자본주의자’가 되는 것에서 멈추어서는 안된다. 물론 이러한 언명이, 사회적 다원주의에 입각한 계급론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앞서 언급한 다종의 억압체계가 유산계급이 무산계급에 대한 지배를 공고하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체계임에 동의한다. 그렇기에 서로 교차하며 존재하는 억압의 체계가 떠받히고 있는 것은, 결국 유산계급의 이익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 다종의 억압체계가 화폐경제와 사회적 부의 분배관계라는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현현한다고 바라본다. 즉, 우리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계급모순은 사회적 모순의 시발점이자, 현대 국가 - 사회에서 귀결하는 지점이기도 하다고 인식한다.

다만, 우리는 ‘자본의 소유관계’라는 하나의 억압을 철폐한다면 인민이 억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소위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국가 · 젠더 · 성적 지향 · 인종 · 민족 등이 계급이라는 토대 위에 놓여, 단지 토대의 형태에 따라 그 형태가 규정지어질 수 있을 뿐인 “상부구조”라 일컫는다.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에서 이른 것처럼, “부르주아지의 집행위원회”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따금, “집행위원회”가 그 “주인”이어야 할 자본가들의 의사에 반하는 것을 목격한다. 자본가들은 노동법을 원하지 않았다. 북유럽의 부르주아지가 너무도 자비로워서 소위 “북유럽식 사회주의”를 용인하고, 미주의 자본가들이 전체의 안녕을 위하여 뉴딜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매년 초여름이면,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최저임금 삭감’이나 ‘차등 적용’ 따위를 이야기하는 남한 유산계급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이제 너무 흔한 일이다. 그렇다고 자본가들이 여성권의 신장을 원한 것도 아니고, 인종차별의 철폐를 원한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이루어진 것은, 각각의 “상부구조”가 유산계급의 즉발적 이익에 반하여 자율적으로 움직인 결과에 가깝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현재의 지배계급이 앞으로도 지배계급으로 남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누군가 소수가 지배하고, 다른 이들이 지배당하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유지된 체제는 결과적으로 노동법으로 노동자들의 자주적 조직의 결성을 막고, 흑인 자본가를 만들어내고, 여성의 구매력을 높여 판매량을 늘리고, 재고품에 무지개색 도색을 입혀 가치를 재창출하는 것으로, 자본을 중심으로 귀결하게 되지만 말이다.

결국, <자유공산주의전선>의 유물론적 사회인식은, 다종다양한 억압들이 각각 ‘토대’를 구성하고, 그 토대가 자본주의적 계급억압을 중심으로 서로 얽히면서 ‘체제’를 떠받히고 있다는 인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인식에 따르자면, 이 토대‘들’ 중 특정한 하나를 타격하고 철폐해내는 것은 체제 자체를 변혁할 수 없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우리는 “반자본주의자”가 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반자본주의자이자 반국가주의자이고, 페미니스트이자 퀴어 활동가이며, 반인종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이고, 반식민주의자이면서 반민족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동시에, 한꺼번에 말이다. 지배계급을 떠받히고 있는 씨줄과 날줄에서 하나의 씨줄을 끊어내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 투쟁의 칼날로 모든 억압의 기제를 동시에 끊어내어야 한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이자 페미니스트였던 벨 훅스 동지는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서문에서 “아무도 지배받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여자와 남자가 무조건 똑같거나 평등한 곳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존중이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틀을 만드는 기준인 세상 말이다. 누구나 타고난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세상에서, 평화와 가능성의 세상에서 산다고 상상해보라. 페미니즘 혁명만으로는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인종차별과 계급 엘리트주의, 제국주의도 함께 종식해야 한다”고 언명한 것이다.

그렇다. 가부장제와 인종차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그리고 언급하지 않은 모든 억압의 구조가 모두 철폐된 그 잔해 위에 세워질 세상은 누구도 지배하지 않는 세상, 서로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타고난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세상이다.

 

국가

국가는, 그 창세신화가 이르는 바와 달리,  개인들의 사회적 계약에 의해 구성된 중립적 질서같은 것이 아니다. 권력구조와 그에 따른 계급구조가 갖추어진 조건에서, ‘자유로운 계약’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여성에게, 성소수자에게, 소수민족에게 이 ‘계약’에 동의하는지는 질문조차 되어본 적이 없다. 국가에 있어 ‘사회계약’이란, 누군가는 지배하고 다른 누군가는 지배당하는 구조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마르크스와 그 일파가 주장하는 바, 국가가 ‘부르주아지의 집행위원회’일 뿐이라는 것에 온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이 주장에서 국가는 지배계급에 복무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렇기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국가의 권력을 소유하면 국가 역시 ‘해방의 수단’이 될 수 있고, 계급의 철폐와 함께 자연스럽게 사멸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국가의 본질은 소유의 주체가 누구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권력을 구조화하고 폭력의 독점을 통해 권력을 정당화하는 방식 그 자체다. 국가의 존재는 누군가가 명령하고, 누군가는 따르도록 만들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지시하는 소수와 복종하는 다수의 분리를 낳는다. 그 이름에 ‘애국’이 붙어있건, ‘민주’가 붙어있건, ‘프롤레타리아의 전체 이익’이 붙어있건건, 결정이 집중되고, 집행이 강제되는 순간, 권력은 위계화되며, 지배의 논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지배의 논리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독점되는 폭력에 의해 정당화된다. 국가는 경찰, 군대, 감옥, 정보기구 등의 폭력의 물리적 수단을 조직화하고 소유한다.(저 기구들 앞에 ‘붉은’이 붙어있다고 해도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총과 곤봉, 테이저건과 물대포, 최루탄과 수갑, 감금과 추방은 개인의 손에 맡겨지지 않는다. 누구도 정당방위 이상의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그것마저도 국가의 승인 아래 제한된다. 이는 곧 국가는 스스로를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로 선언한 것이며, 폭력을 구조화·제도화하여 관리하는 체계로 기능한다.

국가는 이러한 폭력을 무기로 권력구조를 수호한다. 노동자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 명시된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는 이유로 죽음에 이르는 노동을 강요당한다. 국가는 이것을 법적으로 “계약을 준수할 의무”라 명명하며 정당화한다. 그 계약서에 계약을 거부하면, 일을 할 수 없다. 그러고는 국가는 헌법상 “노동의 의무”를 지키라며 어떠한 구호도 하지 않는다. 여성은 저임금과 성차별에 시달리며 일하면서, 동시에 ‘가정을 구성하고 지킬 의무’를 부여받는다. 이는 ‘국가의 유지를 위한 것’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저러한 권력구조에 맞서 개인, 혹은 집단이 방어를 위한 폭력을 행사하면, 국가는 폭력을 동원하여 이를 진압한다. 국가는 지배계급을 위한 질서를 ‘사회 안전’이라 부르고고, 그 질서를 깨뜨리려는 모든 시를 불법이라 낙인찍는다. 이처럼 국가는 폭력을 특정한 방향으로만 허용하며, 해방을 위한 폭력은 원천 봉쇄한다. 국가는 억압을 위한 폭력은 합법화하고, 저항을 위한 폭력은 불법화한다. 그리하여 국가는 폭력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의 방향과 대상을 결정하는 주체로 기능한다.

우리는 이러한 국가의 폭력독점 구조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문제는 단지 국가가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이 아니라, 폭력에 대한 판단권과 행사권을 모두 독점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모든 폭력에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강제를 통해 욕망을 억누르고, 자율을 무력화하며, 질서라는 이름으로 계급과 지배를 유지하는 폭력에 반대한다. 그러나 억압의 구조를 파괴하고, 지배자들이 결코 원하지 않는 해방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폭력은 정당하다. 그것은 ‘범죄’가 아니라, ‘해방의 수단’이며, 국가가 결코 용납하지 않을 피억압자의 권리 행사다.

국가는 결코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은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공공의 안녕’이라는 거짓말로, 우리를 끊임없이 훈육하고 통제한다. 국가는 자신이 없어지면 혼란이 온다고 말하지만, 실상 그 혼란이야말로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며, 진정한 자유의 조건이다. 우리는 국가의 폭력을 타도할 것이다. 우리는 그 독점에 도전할 것이다.


전략 총론 : “무엇을 할 것인가”

혁명적 소수

사회혁명의 주체로서의 대중

우리는 앞서 우리가 바라는 바 사회혁명은, 공고한 대중조직의 자기해방을 위한 투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이 ‘대중조직의 자기해방을 위한 투쟁’은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바쿠닌은 “파괴의 열정은 곧 창조의 열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명제를, 혁명에 있어 구체제의 파괴와 새로운 사회의 건설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바라본다. 그렇다면, 사회혁명에 있어 대중조직의 역할 역시, 파괴와 건설이라는 두 측면 모두에서 논의하여야 할 것이다.

대중이 구체제의 파괴를 위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인류 역사의 상당부분은, 체제와 압제자를 파괴하고자 하는 인민대중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로 이루어져 있다. 중세 유럽의 무수한 농민반란들부터 일본의 잇키까지, 프랑스 대혁명부터 러시아 혁명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체제의 변혁을 가져온 것은 인민대중의 투쟁에 의한 것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저임금 · 장시간 노동 · 고용불안 · 산재위험 · 직장 내 괴롭힘 등이 도사리고 있는 현대의 작업장들에서 그 전제적 공장체제를 바꾸어낼 수 있는 길은 법의 개정이나 노동자 정당의 의회 진출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건설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수년간 임금이 동결되던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을 세우자 임금이 올라가고, 인력이 충원되어 혼자 하던 작업에 2인 이상이 투입되게 되는 경우는 어딘가의 마술교범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한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다른 무엇보다, 현장의 노동조합들이 파업투쟁의 전술을 계획할 때, 그 전술은 노동조합의 지도부나 관료의 머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현장에서 노동하면서 그 노동의 과정과 결과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현장의 조합원 대중들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으로 사업장의 체제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방식을 고안해낼 수 있다. 그렇다면, 현존 체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타격할 수 있는 방식을 알고 있는 것 또한, 사회에서 땀흘려 노동하고, 다른 이들과 관계맺으면서 사회의 실질적 작동과정과 결과를 담당하고 있는 대중들이 아닐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대중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데에는 다소간의 상상력이 필요할 수 있다. 현재의 사회라 할 수 있는 ‘국가’가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것들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그것들을 제공하는 데에 ‘국가’가, ‘지도부’가 필요한지를 생각해보자.

대중 일반의 개량적 본질

하지만 이것이, 대중은 언제나 옳으며 혁명을 내재하고 있다는 낭만적 대중 유토피아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이러한 실험을 이미 진행한 바 있다. 이들은 조직의 구성원들이 “노동조합의 바깥에서 자신의 정치적 · 철학적 관점에 따라 어떠한 형태의 투쟁이건 진행할 완전한 자유”가 있다고 선언하면서도, 그 “정치적 · 철학적 견해”를 “조합 내적으로” 도입하여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개인의 정치적 견해가 아나키즘이건, 마르크스주의건, 사민주의건, 부르주아 민주주의건, 파시즘이건 간에 말이다.

이러한 견해는 두 가지 문제를 낳았다. 하나는 조합의 목적 바깥에서 조합원들의 견해에 대한 개입/추동을 포기하였다는 것이다. 오늘 현장에서 여성노동자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는 파업에 참여했던 노동자가 집에 돌아가 부인을 때리더라도 조합은 이에 개입할 수 없다. 오늘 자기 공장 운영 개입을 위한 투쟁에서 공장주와 멱살잡이를 하던 노동자가 투표장에서 자기 삶의 운영을 히틀러에게 위임하는 결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조합은 이에 개입하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사회의 일부가 바뀌는 ‘개량’이 아니라, 사회가 총체적으로 바뀌는 ‘혁명적 변혁’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혁명은, 사회 상층에 대한 타격을 통해 일부의 신분이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인민대중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억압기제를 타도하는 자기해방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조합, 흑은 조직이, 자기 핵심과업 바깥의 영역에 대하여 ‘중립’을 선포하였을 때, 그것이 혁명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조합원들 삶의 일부의 영역에서는 자기주도적 변혁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나머지 영역들에서 여전히 억압기제가 작동하고 있다면, 이것은 혁명적 변혁이 될 수 없다.

또 다른 문제라 한다면, 조합이 목적 내에서 조합원들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할 때, 그 행동에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을 포기하였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의 노동조건 개선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지만, 너무 ‘아나키즘’적이기에 생산의 자주경영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주민 조직이 그 구성원들의 국외추방에 항의하여 투쟁할 수는 있지만, 너무 ‘국제주의’적인 국경의 철폐를 이야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이는 현대에서 ‘정체성 정치’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특정한 억압기제가 억압의 ‘토대’이며, 나머지는 그 ‘토대’에 기반하여 파생된 ‘부차적 억압’이라는 개념을 거부한다. 결국 해방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모든 억압의 총체적 파괴다. 노동자들이 산업을 자주경영으로 돌리는 데에 성공한다해도, 그 산업 안에 여전히 여성노동자에 대한 임금 차별이나 비정규직에 대한 고용상의 차별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그저 경영자가 노동조합으로 바뀐 것이지, 산업의 해방이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대중조직이 직접행동과 투쟁을 통하여 사회를 재건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가 ‘아나키스트’ 사회라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현존 체제가 존재하는 한, 절대 다수의 상황에서 대중조직의 ‘최대 이익’은 혁명적인 투쟁보다는 오히려 타협과 양보를 통한 계급의 상승으로 확보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그토록 욕하는 ‘비정규직 문제에 신경쓰지 않고’ ‘자기 기득권을 사수하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계급투쟁적이라기보다는 계급타협적인’ 대공장 정규직 노동조합의 사례를 생각해보자.

이들이 처음부터 개량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그 누구보다 한국의 전투적 조합주의 전통의 선봉에 있었다. 그렇다고 누군가 비민주적이고 노사상생주의적인 자들이 조직 상층부를 정치공작으로 탈취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타협없는 투쟁을 외치는 혁명가들이 지도부로 선출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을 뿐이다. 그저 체제가 이들 조직을 끌어안기 시작하면서, 이들 대중조직이 체제내화되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최대이익은 누군가가 부상당하고, 누군가가 체포되고, 누군가가 구속될 수 있는 투쟁에 임하는 것보다는, 적당한 시점에서 타협하고 양보하는 것에 있게 된 것이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기 이익에 복무하는 직접행동을 통해, 계급적 분할책동을 강화하고 그에 복무한다.

이에 더하여, 국가라는 것이 태동한 것도 어느덧 수천년이 되었다. 한반도에서 중앙집권국가가 수립된 것이 어언 1천년 전이고, 국가가 인민들의 삶에 개입하는 것이 당연한 체제가 세워진 것도 500년이 넘었다. 자본주의라는 질서가 탄생하고 정착되어 온 것도 수백년이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인민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해준다는 복지국가의 개념이 등장한 것도 거의 100년에 달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쳐야 하는 대중들은 이러한 체제에서 태어나서, 이러한 체제에서 교육받으며 자라온 사람들이다. 대중들이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것이, 국가가 나의 삶에 개입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올바른 것으로 여기는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대중운동이 체제내화되는 순간 입법운동 · 의회운동 · 정권교체운동으로 선회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들이 못나거나 나약해서가 아니다. 그저 이들에게 체제내적으로 주어진 대안이 이것들 뿐인 것이다. 이들에게 지금 시점에서 가장 ‘이기적인’ 선택은 체제에 반란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에 복무하는 것에 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중과 대중조직의 역량의 한계, 인지의 한계를 바라보면서도, 그 대중의 한계를 그저 받아들이고 추수해야 하는가. 그저 대중이 스스로 조직해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고, 직접 행동을 통해 자기 이익을 추구한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인가.

혁명적 대중으로서의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역할

우리는 지극히 상식적인 인간이므로, 대중의 동질성을 거부한다. 사람 1,000명이 있다면, 누군가는 축구를 잘하고, 누군가는 영어를 잘하고, 누군가는 컴퓨터를 잘 고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가장 혁명적이고 자유의지적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 ‘가장 혁명적인 대중’, 혹은 혁명적 소수의 존재를 긍정한다.

우리는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자로서 이 혁명적 소수를 구성한다. 즉, 우리는 대중의 가장 급진적인 일부이자 가장 적극적인 대중 권력의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

 이는 엘리트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대중 내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서 비롯되는 정치적 실천의 위치다. 혁명적 소수는 대중의 외부에서 계몽하거나 조작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대중의 일부로 존재하는 동시에 대중의 가장 급진적인 경향을 의식적으로 조직화한 정치적 표현이다.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추수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과 타협을 넘어서고자 하는 열망을 실천으로 전환시키는 전위다.

(‘전위’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마르크스-레닌주의 전통의 ‘전위당’ 개념과 혼동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하는 ‘전위’는 대중 위에 군림하거나 대중의 승인으로 지도부가 되는 ‘전위당’이 아니다.. 우리에게 있어 전위는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조직 속에서, 가장 급진적인 방향을 추구하며 투쟁의 열기와 방향성을 형성해내는 실천적 중심이다. 대중의 외부, 혹은 대중조직의 상층에서 지시하는 존재가 아니라, 대중 속에서 형성되는 급진적 경향들의 집약이며, 투쟁의 도정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는 조직화된 열정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게 전위는 ‘대표’가 아닌 ‘실천’이다. 대중조직이 체제 내로 통합되는 경향을 보일 때, 이 전위는 무비판적 추종이 아니라 원칙에 기초한 투쟁을 통해 대중운동의 방향을 재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즉, 전위란 ‘명령하는 자’가 아니라 ‘가장 먼저 싸우는 자’이며, ‘대중의 지도자’가 아니라 ‘해방의 과정에서 형성되는 공동의 실천자’인 것이다.)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역할은 단순한 이론적 선도에 그쳐서는 안된다. 우리는 조직 내부에서 대중조직이 직면한 한계를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이론적·전술적 토대를 제공해야 한다. 대중조직이 스스로 투쟁의 방향을 설정하고, 계급적 자기해방이라는 목적을 명료히 하며, 조직이 체제에 내포되거나 타협으로 후퇴하는 것을 끊임없이 견제하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이것을 ‘지도부’로 선출되어 방침으로 제시한다는 ‘쉬운’ 방법이 아닌, 조합원 기층을 설득하고 이를 통해 아래로부터의 정치세력화를 만들어내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실질적 투쟁에 함께하며 대중 속에 개입하고, 대중의 자생적 행동에서 드러나는 해방의 가능성을 포착하고 확장하여야 한다.

대중조직이 스스로 조직하여 행동에 나선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혁명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조합이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방치하고, 공장 내 자주관리를 내세우면서도 자기 집에서는 젠더 불평등을 유지한 채 운영된다면, 그것은 단지 권력의 주체가 바뀌었을 뿐 권력구조는 그대로 존속하는 것이다. 혁명적 소수는 이러한 ‘불완전한 해방’을 넘어서기 위해 존재한다. 억압의 총체적 철폐를 위해, 다양한 억압의 구조들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며, 대중운동이 특정 부문의 경제적 개선에서 멈추지 않고 전체 사회의 변혁으로 나아가도록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또한 혁명적 소수는 대중조직의 전술과 실천을 단순히 추수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급진적인 전술과 실천의 방법론을 대중 속에서 확산시켜야 한다. 이는 대중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함께 배우고, 함께 싸우고, 함께 조직을 재구성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자는 ‘대표자’가 아니라 ‘기층’이며, ‘지도자’가 아니라 ‘동지’로 남아야 한다. 우리는 당면한 현실 속에서 언제나 가장 멀리까지 나아가고자 하며, 대중 속에서 실현 가능한 가장 급진적인 미래의 가능성을 실천을 통해 열어젖힌다.

사회적 개입

우리는 대중조직에 사회적으로 개입한다. 우리는 대중조직과 별개인 공고한 정치조직을 구성하되, 그 행동태는 대중 바깥에서의 ‘지도’가 아닌 대중 속으로 들어가 가장 급진적인 대중분자로 존재하며 투쟁의 방향을 실천 속에서 형성해나간다.

오늘날 대중은 국가, 자본, 가부장제, 인종주의, 성정상성, 국경 등의 체제 질서 속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으며, 살아간다. 그리하여 대중의 감각과 상식, 삶의 기준은 이미 체제가 허용하는 수준에 머문다. 때문에 대중의 자생적 투쟁은 종종 부분적이며, 일반적으로 체제 내부에서의 이익 조정에 머무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한계 때문에 대중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로 그 안에서 해방의 전망을 끌어올리고 조직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다. 오로지 거대한 대중의 단결된 투쟁만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조건으로 받아안고, 그 안에서 사회혁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우리는 대중조직의 바깥에서 정답을 외치는 철학자가 아니라, 대중조직 내부에서 대중과 함께 투쟁하면서, 동시에 그 투쟁을 가장 멀리까지 추동한다. 우리는 대중의 지도부를 구성하지 않는다. 우리는 조직의 상층에서 명령을 내리는 ‘대표자’가 아니라, 조직의 기층에서 함께 실천하고 방향을 형성하는 ‘동지’로 존재한다.

우리는 사회적 개입의 구체적 방향으로 다음의 세가지 원칙을 견지한다.

하나. 우리는 현존 투쟁의 내부에서 그 투쟁이 가능한 혁명적이 될 수 있도록 추동한다. 올해의 임단투가 단지 임금 얼마를 올리는 문제가 아니라 사용자의 경영권 그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도록, 여성노동자들의 임금격차 해소 요구가 단지 올해의 임금 문제가 아닌 가부장적 위계질서 전반에 대한 저항으로 확대할 수 있도록, 우리는 정치적 추동과 이데올로기적 선도를 통해 현장과 위치에 따라 파편화된 투쟁들에 총체적 해방의 전망을 접합시켜야 한다. 대중이 이미 수행하고 있는 투쟁을 지배 질서 전반에 대한 도전으로 발전시켜 내어야 한다.

하나, 우리는 대중이 체제 내에서의 개량에 만족하려 할 때, 이에 대한 비판을 조직하고 기층으로부터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집행한다. 타협과 양보, 의회주의와 정권교체에 매몰되는 대중운동의 흐름 속에서,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자는 조직의 관료화를 견제하고, 대중조직이 다시금 자기해방의 주체로 기능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재조정하는 실천의 선봉이 된다.

하나, 우리는 대중조직 내부에서 다른 정치적 경향들과의 투쟁을 통해 조직의 방향성을 보다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의 방향으로 추동한다. 우리는 ‘중립’을 가장한 정치 회피를 거부하고, 노동계급의 주체적인 정치세력화를 꾀하되, 그 정치세력화가 외부의 정당에 대한 지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의 투쟁과 실천의 방향이 해방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이데올로기적으로 선도해야 한다.

결국, 다시 한 번, 우리는 사회적 개입의 과정을 통해 대중 안에서 우리의 정치적 방향을 드러낸다.

교차성 운동

현존 체제의 계급구조는 단일한 축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단순히 임노동을 매개로 한 착취의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젠더 위계, 인종적 배제, 국적과 시민권에 따른 분할,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성적 규범성, 연령주의, 장애 차별 등 수많은 권력 장치들이 자본을 중심으로 상호 교차하며 재생산되는 억압의 체계다. 현 체제의 지배는 곧 교차적 권력의 집합적 장치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일한 모순에 대한 단일한 해방운동이 아니라, 교차하는 권력구조에 대한 다중적이고 총체적인 공격이다. 우리는 여성-고령-비정규 노동자, 외국인-여성-성소수자, 이주노동자-장애인-청년과 같은 교차지점에 놓인 존재들의 삶에 주목한다. 이들은 단지 피해의 총합이 클 뿐 아니라, 억압구조의 교차점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투쟁이 전체 구조를 동요시킬 수 있는 전략적 고리를 형성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모든 전선에서 동시에 싸울 만큼 충분한 수와 자원을 갖고 있지 않다. 혁명적 소수로서 우리의 실천은 항상 제한된 조건, 제한된 수단, 제한된 조직력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때, 단일한 모순만을 타격하는 운동이 아니라 여러 권력 구조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실천을 구성하는 것은 단지 이념적으로 ‘옳아서’가 아니라,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기 때문이다.

교차적 조건에 위치한 이들의 투쟁은 단지 억압의 총합이 크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투쟁은 지배 구조의 복수의 축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이 놓인 삶의 조건과 투쟁의 조건을 단순한 피해서사나 동정의 대상으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 교차지점에 개입함으로써, 자본과 젠더, 국경과 시민권, 생산과 재생산이라는 각기 다른 전선이 하나의 균열로 연결되도록 정치적 전선을 재구성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여성운동이 젠더폭력에 대한 저항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서의 성별 분업과 임금격차를 문제삼을 때, 그것은 단지 ‘페미니즘’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핵심 전선이 된다. 마찬가지로, 이주민 운동이 단지 국경 문제를 넘어서, 사회적 재생산과 국민국가 체계 전체에 대한 도전으로 나아갈 때, 그것은 체제 전반을 뒤흔드는 해방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단순히 ‘모든 억압을 다뤄야 한다’는 도덕적 무게로 투쟁을 설계하지 않는다. 우리는 체제를 가장 취약하게 만드는 고리를 찾고, 가장 적은 힘으로 가장 큰 균열을 만들어내기 위한 전술로서 교차지점을 타격하는 것이다. 이 효율성은 수적 열세 속에서도 체제를 실질적으로 교란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 길이다.

억압은 구조적으로 교차한다. 해방도 마찬가지다.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는 단일한 정체성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의 분할과 위계를 유지하는 구조 전체를 파괴하는 정치적 실천이다. 우리가 겨누는 것은 단지 착취의 한 축이 아니라, 그 축들이 서로를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체제 그 자체다. 우리는 체제에 가장 큰 균열을 가져올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지점, 즉 교차지점에서 투쟁한다.

조직론

이중조직

투쟁을 조직하는 데에 있어, 우리는 정치조직과 대중조직을 구분해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대중조직은 노동조합, 주민조직, 사회운동 네트워크처럼 광범위하고 이질적인 대중을 포괄하며, 당면한 생존권·노동조건·차별 철폐 등의 요구를 바탕으로 형성된다. 그러나 이들은 국가와 자본, 가부장제, 인종주의 등의 질서 속에서 성장했기에 자생적 투쟁은 종종 부분적·개량적 성격을 띤다.

반면 정치조직은 조직적, 이론적, 전략적, 전술적으로 단결한 활동가들의 조직으로서, 대중조직과 별개 구조를 이루되 대중 속에서 활동하며 가장 급진적인 방향을 추동하는 혁명적 소수로 존재한다. 정치조직은 대중조직이 개량주의와 체제 내화로 경도되는 경향을 견제하고, 억압 구조 전반에 도전하는 전망을 대중투쟁과 접합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정치조직은 대중조직의 지도부가 되지 않으며, 대중 속에서 형성되는 급진적 경향의 집약체이자 가장 앞장서서 투쟁한다한다.

정치조직의 책무는 단순한 이론적 선도에 그치지 않는다. 첫째, 현존 투쟁 속에서 개별 쟁점을 억압 질서 전체에 대한 도전으로 확장시킨다. 둘째, 대중운동이 의회주의와 타협으로 경도될 때 기층에서 비판과 재조정을 조직한다. 셋째, 노동·젠더·인종·국적·장애·섹슈얼리티 등 교차하는 억압 구조를 동시에 겨냥하며, 부분적 개선에 만족하지 않고 사회 전 영역의 변혁을 지향한다. 넷째, ‘지도부’ 선출을 통한 명령이 아니라 조합원 기층과의 토론과 설득으로 아래로부터 정치세력화를 만들어낸다. 다섯째, 대중조직 외부의 지시자가 아닌 투쟁의 한가운데서 실천하고 위험을 공유하는 동지로 존재한다.

우리는 대중조직과 정치조직을 단절된 구조로 보지 않는다. 두 조직은 상호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는 광범위한 대중의 실천적 힘을, 다른 하나는 원칙과 전망의 힘을 제공해 서로를 보완하며, 이를 통해 대중운동이 단순한 협상력이 아닌 억압과 지배의 전면적 해체로 나아가도록 한다. 정치조직의 책무는 대중 속에서, 그리고 대중과 함께, 해방을 향한 가장 먼 길을 실천으로 여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총동맹

우리, 자유공산주의전선은 디엘로 트루다의 <아나키스트 총동맹의 조직적 강령>에서 제시한 아나키스트 총동맹의 상에 동의한다. 혁명은 단기적 대응이나 느슨한 결사로는 완성될 수 없다. 국가르는 공고한 구조를 해체하려면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실천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조직적 통일, 이론적 통일, 전술적 통일의 세 가지 원칙을 기반으로 한 책임 있는 조직을 건설한다.

조직적 통일은 구성원들이 제각기 움직이지 않고, 하나의 공동체로서 상호 연결되어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상부의 명령에 따른 일체화가 아니라, 합의된 이론과 전술에 기반한 역할 분담, 책임 공유, 실천 협력을 의미한다. 느슨하고 일시적인 연대는 책임을 분산시키고, 지속적인 실천 역량을 약화시킨다. 우리는 합의와 숙의, 상호 존중 속에서 자율적으로 역할을 정하고, 공동의 결정을 실행할 책임을 진다. 이러한 내부 규율은 위계의 강제가 아니라, 조직의 자율성과 지속성을 보장하는 약속이다.

이론적 통일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세우고자 하는지, 현 체제의 억압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이를 해체할 것인지에 대한 공유되고 합의된된 분석과 비전을 의미한다.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는 국가권력과 모든 위계적 지배 관계를 철폐하고, 경제·정치·문화 전 영역에서 작동하는 다층적·교차적 억압을 동시에 무너뜨리는 전망이다. 이러한 이론적 기초가 없다면 조직은 방향을 잃고, 투쟁은 분산된다. 이론은 고정된 교리가 아니라, 실천 속에서 비판과 갱신을 거듭하며 우리를 하나로 묶는 기준점이다.

전술적 통일은 분석된 현실에 기초하여, 합의된 전략과 일관된 실천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위계적 명령체계가 아니라, 구성원 전원의 토론과 합의를 거친 공동의 실천 약속이다. 동일한 투쟁에서 상반된 태도를 취하면 대중 속에 혼란이 생기고, 힘은 분산된다. 우리는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도 하나의 전략적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이를 통해 대중운동을 개량주의나 체제 내 협상력에 머물지 않게 하고 총체적 해방으로 추동한다.

우리는 아나키스트 총동맹을 구축해, 대중조직 속에서 대중을 추동하는 혁명적 소수로서, 전위로서 싸워나갈 것이다.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를 향하여.

비타협적 타협주의

자유의지주의적 공산주의자로서 우리는 언제나 모든 투쟁이 가장 멀리 나아가도록 추동한다. 우리의 임무는 대중의 분노를 정리하고 질서 있게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노 속에서 구조를 전복할 가능성을 끌어내고, 가능한 가장 급진적인 실천을 조직해내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투쟁이 체제의 근본을 겨누도록 실천을 확장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 추동이 ‘마지막 순간까지 타협 없이 싸우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혁명의 주체는 대중이며,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어떤 선언적 승리보다 대중조직의 존속과 성장이다. 어떤 투쟁도, 그 결과가 ‘패배’라 불리더라도, 대중이 자기 삶의 조건을 직접 조직하고 결정하는 경험을 축적한 투쟁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해방세상으로의 진전이다.

우리는 ‘모든 요구를 관철할 때까지 결연한 투쟁’의 결과로 결의된 소수의 활동가들만이 남고, 대중조직 전체가 소진되거나 해체되는 방식의 투쟁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우리는 그것이 결국 혁명의 전선을 ‘선진 분자’만의 투쟁으로 환원시키고, ‘남은 자들끼리의 당’으로서 전위당을 구성하는 것으로 귀결한다고 바라본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이번 투쟁이 혁명에 이르지 못했다면, 이번 혁명은 또 다시 패배한 것이라면, 대중조직이 그 패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다음 투쟁을 준비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투쟁도 고립된 사건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번 싸움이 체제를 전복하지 못했다면, 최소한 다음 투쟁에서 한 걸음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남겨야 한다. 대중조직이 존속하고, 대중이 다시 싸울 의지를 잃지 않는 한, 혁명은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이번 싸움에 패배했을 뿐, 다음 승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조직을 남기는 것은 단지 수적 보존이 아니라, 역량과 전망을 물질적으로 계승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대중이 스스로 결정한 모든 타협에 동의하며, 그것을 존중한다. 타협은 배신이 아니다. 문제는 그 타협을 어떤 방식으로, 어떤 조건에서 만들어내느냐에 있다. 우리는 가장 급진적이고 혁명적이며 직접행동에 기반한 투쟁 만이 최선의 타협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타협은 투쟁의 결과이지, 투쟁의 회피가 되어선 안 된다.

우리는 개량을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혁명적 실천의 산물일 때에만 그것을 승인한다. 법 개정, 복지 확대, 임금 인상, 고용 안정과 같은 조치는 체제 내 성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국가나 자본의 시혜가 아닌, 대중의 집단적 힘과 투쟁으로 쟁취된 것이라면, 그것은 혁명의 부분이다.

사회혁명은 하루아침에 달성되는 정권교체 따위가 아니다. 우리는 한순간의 영웅적 봉기나 극적인 전환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지 않는다. 혁명은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누적된 혁명적 투쟁의 패배와 성과, 그리고 그 안에서 대중이 주도성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건설되는 과업이다.

비타협적 타협주의는 바로 이 과정을 염두에 둔 전략적 실천이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싸움이 완결된 혁명은 아닐지라도, 그 싸움이 다음 투쟁의 토대를 만들고, 조직을 남기고, 의식을 남기고, 해방의 방향을 기억하게 하는 전술적 퇴각이자 다가올 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이 되도록 하는 태도다. 우리는 언제나 가장 멀리까지 나아가되, 대중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잃지 않도록 한다. 이것이 혁명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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