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지의 오독에 관하여 : 다양하다면 일치시키지 말고 분열하라 - C. Necromancy of 아나키스트 연대

이 글은 ○○○ 동지의 <다양성 안의 일치 : 우리의 무기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신이다. 해당 글이, <강령>에 대한 다양한 방향의, 역사적으로 꾸준히 이루어져 온 오독들을 수없이 많이 포괄하고 있는 글이기에, 해당 오독에 대한 수정을, 이 글을 통하여 하고자 한다.

형식적인 서론/본론/결론은 집어던지고,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첫째, “아나키스트 총동맹”은 모든 ‘아나키스트’를 포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아나키스트 총동맹”은 강령에 동의하는 구성원들의 ‘아나키즘’을 포괄하기 위한 조직이다. 모든 아나키스트들을 하나의 우산조직에 묶어낼 이유도, 그러할 필요도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디엘로 트루다의 동지들 스스로가, 모든 아나키스트들을 하나로 묶어내기를 원하지 않았다. <강령>은 인본주의적 아나키즘을,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을 “올바르지 않다”고 쳐내었다. 그리고 계급투쟁적 아나키즘의 조류를 묶어내고자 시도했다. 강령이 추구하는 것은 통합이 아닌 더욱 많은 분열이다. 그리고 분열한 조각들이 조각 내에서 내적으로 단결하는 것이다.

둘째. ‘통합’의 운동성 상실은, 이러한 분열을 막아내고, 조직의 규모를 키우기 위하여 조직의 공고함을 포기한 데에서 나오는 것이다. ‘통합’은 “아나키즘의 대원칙인 ‘나의 행동을 내 자유의지로 판단하고 실행한다’는 것에 부합”하지 않는다. 내가 죽어도 저 유일자 테러리스트 새끼들과는 함께 활동할 수 없겠는데, 아나키즘 운동의 ‘통합’을 위하여 “토론”을 요구한다. 우리의 조직은,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형태를 갖추어야 하지 않는가? 공동체적 합의가 이루어졌을 때, 그 합의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나의 입장을 바꾸거나-그 결정을 바꾸기 위해 조직을 꾸리거나-정 안되면 나가서 따로 살거나 선택할 자유가 있는 사회가, 우리가 원하는 사회가 아니었던가? ‘통합’은 이 상황에서, 운동의 ‘통합’을 위해 나의 운동적 원칙을 포기하라고 한다. 아나키즘 운동이 아무리 희미한 대의로만 남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통합’의 길이라면 감내하라고 한다. 결국 ‘통합’은 나의 운동적 원칙을, 아나키즘 운동의 통합이라는 대의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이다. 볼린이야말로, 아나코-의회주의자 같은 것이 아닌가. 사실상. 오히려 조직적 강령의 밀도를 낮추지 않고, 공고한 강령에 동의하는 활동가들이 공고한 조직(“총동맹”)을 통하여 공고하게 활동하는 것이, <강령>에서 말하는 아나키즘 운동의 상이 오히려 ’나의 행동을 내 자유의지로 판단하고 실행‘하는 것에 가깝다.

셋째. ○○○ 동지는 “대중이 정말로 ‘올바른 방향을 모르고 외부의 조직적 지침 아래 특정 방향으로 인도되어야할, 혹은 이끌어져야할’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누구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무엇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나키스트 활동가들은, 한명의 대중으로서 <그들이 원하는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주장을 최대한도로 하여서는 안 되는 것인가? 그리고 대중이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조직하듯, 아나키스트적인 활동가/대중 역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조직하면 안 되는 것인가? 그 조직이 곧 ‘총동맹’이고, ‘강령’이며 ‘전술적 일치’다. 오히려, 우리가 “아나키스트”라고 하여 우리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도움을 주는’ 것으로 퇴각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볼린의 입장이야말로, ‘도움을 주는’ 것이 과연 스스로를 전위로 올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은 차치하더라도, 아나키스트 활동가/대중을 일종의 “도덕적 전위”로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나키스트”들은 개인적 책임과 결의로, 대중을 조직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말라테스타는, 음, 쓰다보니 왜 말라테스타가 결국 아나코-파시즘으로 귀결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 동지의 오독들을 읽으며, 다시 한 번, <강령>의 내용을 점검하고 가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리고 그 점검이, 단순한 내용의 요약이 아니라, 그 운동적 함의에 대한 점검이 이루어질 필요를 더욱 느낀다.

<강령>은 통합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분열의 이데올로기다. <강령>은 스스로 아나키스트라고 자칭하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운동/활동을 하나로 묶어낼 필요성을 부정한다. 아니, 그것을 <아나키즘>이라 일컫는 것조차 부정한다. 조직의 구성원들이 합의한 <아나키즘>과 판이하게 다른 무언가를, 우리 조직이 왜 <아나키즘>이라고 불러주어야 하는가?라고, 본질적으로 물어온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이야말로, (사회적)아나키스트들이 원하는 사회의 재구성태가 아닌가? 서로 동의하는 입장을 가진 인민대중끼리 합의한 조직/공동체가, 그들의 자발적 규칙에 따라 생산하고 살아가는 것 말이다. 물론 그 공동체들간의 연방적 결합,이라는 중요한 부분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연방을 꾸리기 위해서는 두 개 이상의 조직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구성된 공동체가, 무슨 국제공산당마냥, 다른 공동체를 조직해주는 것이 아나키즘적으로 가능한가?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우리 스스로의 조직(총동맹)을 만들고,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규칙(강령)을 만들고, 그 규칙에 따른 집행(전술적 단결)을 행하고, 그 집행에 대하여 공동으로 책임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광의의” 따위로 의미를 축소시켜서는 안되는) <강령>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을 통하여 우리가 해야할 일은, 대중의 ‘추동’이다. 대중이 만들어갈 사회가, 조금 더 우리가 바라는 사회에 가깝도록 대중을 조직하는 것이다. 대중이 조직하지 않으면 공고한 위계적 폭력에 맞서 사회를 본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건설할 수 없기에 조직하는 것처럼, 아나키스트 또한 그렇다. 그리고 그 우리가 사회가 특정한 형태이기를 바라는 것은, 그 사회가 ‘올바른’ 사회여서가 아니라, ‘우리가 바라보기에 올바른’ 사회여서다. 각자의 ‘올바름’은 다를 수 있고, 각자가 자신의 ‘올바름’을 최대로 발화하고, 그 속에서의 합의, 혹은 미합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나키즘”의 이상이다.

○○○ 동지가 결론에서 내어놓은 말은 옳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올바름을 가진다. 그 올바름들이 만나는 곳에서 합의가 발생한다. 우리의 무기는 모두가 더욱 다양해지는 것이다. 대중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우리는 우리의 올바름을 발화하여서는 안되는가. 그 올바름을 발화하고, 관철하는 데에 있어 최선의 방식이, 우리가 우리의 올바름에 따라 하나의 조직으로 공고히 단결하는 데에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고한 단결을 회피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사회 전체적인 아나키즘적 재편을 위해서?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관념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테제다. 사회 전체를 위하여, 우리의 올바름을 희생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조직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지도”할 수밖에 없어서? 그렇다면, 그것은 더욱 긴 이야기를 통해 나누어야 할 논제가 되겠다.

대중은 분명히, 누군가의 지도가 없어도 사회를 구성한다. 그럴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나키즘이다. 하지만, 그 대중이 새롭게 구성한 “사회”가, 우리가 원하는 사회라고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 대중이 새로운 지도자를 아래에서부터 추인할 수도 있다. 대중이 만든 새로운 사회에서, 여전히 임금노예제가, 성차별이, 인종주의가, 혐오가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대중이 그러한 사회를 구성하려할 때, 우리가 그것을 추수해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의 요구를 최대한 발화하며 대중을 추동해야 하는가.

전자라고 답한다면, 그것이 아나키즘이라고 답한다면, 그러한 아나키즘은 사회를 변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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