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유튜브를 켜 보았다. 정리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되어, 내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채널들이 구독 목록에 있더랬다. 스크롤을 쭉 내려봐야지, 싶어서 내려봤더니 거기에 나의 잼민이 시절이 있었다. 초딩들의 필수 게임이 로블록스가 아닌 마인크래프트였던 시절. 내 인생 첫 스마트폰과 함께 찾아온 유튜브는 애플의 마인크래프트요, 처음으로 본 인방은 대도서관의 마인크래프트였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인터넷 방송 최상단에 항상 시청자가 많던 방송들은 언제나 다음과 같았다. 방장이 예쁘다. 방장이 몸매가 좋다. 방장이 춤을 잘 춘다. 방장이 말을 잘한다. 방장이 게임을 잘한다. 인방판이란 그런 세상이었다. 이 모든 것, 아니면 적어도 하나라도 갖춰지지 않았던 비제이들은 저 밑에서 시청자 서너 명이랑 놀고 있더랬다.
무한도전이나 1박 2일도 즐겨보던 내가 티비보다도 인터넷 방송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그 재밌게 보던 티비 프로그램과 인터넷 방송은 다른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감이었다. 나영석, 김태호와 내가, 강호동, 유재석과 내가 실시간 피드백을 주고받지는 않고 그럴 수도 없었다. 우리 누나가 무한도전 게시판에 분노의 수천 자짜리 항의글을 쓰는 것 마냥, 기껏해야 방송국 게시판에 글을 쓰는 것 정도? 이래봐야 답을 주는 경우는 적다면서 나한테 괜히 심술을 부리기도 했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질풍노도의 씹덕중학생이 되었다. 그런 내게 귀여운 일러스트를 띄워놓은 유튜브 영상이 보였고, 그 순간 나는 “듀라한” 방송의 시청자가 되었다. 얼굴이나 신체를 공개하지 않고 대신 일러스트로 자신을 대신하는 사람들. 목소리도 꽤 괜찮았고, 얼굴을 까지 않다 보니 더 열심히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딱히 인방에서까지 사람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이것에 빠져든 뒤로 알게 됐다. 이것도 꽤 돈이 든다는 것을. 특히 일러스트나 콘텐츠 제작 같은 것에 들이는 심력과 돈이 많다고 하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드러내놓고 방송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체가, 그것을 필수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이 더 방송을 시도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얼굴을 노출하고, 내가 방송하는 나의 방 (그것이 설령 스튜디오라 할지라도) 을 노출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나의 사생활들을 노출하지 않고서도 방송을 할 수 있음은, 이를 두려워했던 사람들이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머리가 점점 굳어 인터넷 세계에 완전히 정착했을 무렵. “키즈나 아이”라는 채널을 발견한다. “버추얼 유튜버” 라는 것, 3D 캐릭터가 신체를 움직이며 캠방인데 캠방 아닌 것같이 방송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제는 덜-질풍노도의 씹덕고등학생이 된 나에게 버튜버의 세계는 늪과도 같았다. 지금까지도 이 세계에서 헤엄치고 있을 정도로. 듀라한이 낮춰놓은 문턱을 버튜버는 더 낮췄다. 그냥 어디서 공짜로 주워 온 저급한 2D 모델링으로 방송하는 하꼬들이 하루에만 몇 명씩 생기는 수준이니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사실 더 좋은 아바타, 3D 모델링을 만들고 더 좋은 움직임을 선보이기 위해 사용해야 할 돈은 당연하지만, 엄청 비쌌다. 마치 듀라한들이 일러스트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은 것처럼. 하지만 일러스트 쪼가리 하나 보면서 채팅을 치는 것보다, 움직이는 3D 그래픽과 대화하는 게 진짜 대화하는 기분이 든다는 것은 당연했다. 소위 “안의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부담감 해소까지 더해져, 무슨 방송의 포켓몬 최종 진화인 것 마냥 지금까지 오고야 말았다. 거기에 AI 발전으로 “딸깍” 한 번에 아바타 초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 보라. “딸깍”
인터넷 방송에서 느껴지는 해방감이라는 것은 결국 어디서건 방송하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고, 집 안 일요일 4시에서만 본방 사수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인터넷만 있다면. 핸드폰과 컴퓨터만 있다면 어디서, 언제나 방송을 볼 수 있다. 더 많은 사람이 방송이라는 문화를 즐기게 됐고, 이 방송이라는 문화를 즐기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즐기는 사람이 방송을 해보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 건 자연스러웠다.
옛날 높으신 분들의 고상한 문화라는 것을 돌이켜보면, 향유하는 작자들이 곧 문화를 생산해 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시대 양반님네들만 봐도, 사군자를 그리지 못하면 양반 취급조차 안 해줬다지 않나? 일본 사무라이가 할복하기 전에 유세이를 줄줄 읊을 줄 몰랐다면. 일본의 지배 계층들이 하이쿠를 읊을 줄 몰랐다면 지체없이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하라키리!”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지배계급만이 문화를 향유하던 때 문화를 창조할 권리는 오롯이 지배계급에 귀속되었다.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문화를 전체 인류가 향유하고 있는 현대의 대중문화 속에서도, 문화를 창조할 권리는 지배계급-자본에 귀속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노동계급의 스포츠였던 축구는, 어느덧 메가 클럽들이 독점적으로 생산하는 문화가 되었다. 애니판이 몇몇 대자본, 혹은 제작위원회의 의중에 따라 창작물의 내용이 멋대로 바뀐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인방판이 레거시미디어의 장벽을 낮추어대봤자, 그 역시 대형 MCN들, 나아가 플랫폼 기업들의 입맛에 맞춰 굴러가는 판인 것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자신이 소비하는 문화의 창조자 됨을 포기하지 않는다. 씹덕질의 절정에 이르렀던 중-고등학생 시절의 나는 라이트노벨과 애니메이션을 너무나도 감명 깊게 본 나머지 고등학생 자발적 왕따의 철학적인 고등학교 생활기를 소설로 적어 공모전에 출품하기까지 했다. 대차게 떨어지고 눈물을 머금고 그 길을 포기했다만.
인터넷 방송만 예시로 들어보아도 처음에 나타났던 장벽들이, 즉 외모, 실력, 말빨이라는 장벽들이 더 많은 이들이 이 문화에 뛰어들수록 허물어지고 낮아진다. 그리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얼굴 까기 힘드니 듀라한으로, 듀라한보다 더 생동감 있게 방송은 하고 싶으니 버튜버로 넘어가는 시대가 왔다. 아까 적었다만, 신규 방송인 중 이제 버튜버가 아닌 사람을 찾는 것이 힘든 시대가 온 것이다.
누군가는 말할 수 있겠다. 대중문화란 결국 전문적인 사람들이, 방송을 예시로 들었을 때, 방송인 내지는 초-머기업 스트리머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이건 대중의 참여가 아니라 그놈들의 자본과 고용된 전문적 인력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냐고. 딱히 틀리지는 않는다. 초기 인터넷 방송에서는 방송인 본인의 스펙이, 듀라한의 시대에서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버튜버의 시대에는 더 뛰어난 3D 모델링과 리깅을 맡아주는 소위 마마, 파파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벽 역시 깨어지리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더 많은 사람이 문화를 향유하고 생산하게 될 때, 소수의 기술자에게 맡겨야만 했던 중앙집중적인 문화창조, 독점적 문화창조의 구조가 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독점구조들이 완전히 깨어져 모든 이들이 진정으로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을 때, 문화라는 것은 진정으로 해방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방조차, 플랫폼 기업들, 거대 AI 플랫폼들의 이윤 독점으로 귀결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우려는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 문화를 즐기는 대중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대중이 자신의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대중문화 안으로 뛰어든다. 더 많은 이들이 그 문화의 소비자임과 동시에 창조자가 되고자 한다. 그럴 때, 문화는 더 이상 기획자, 플랫폼, 자본, “머기업” 들이 내려주는 상품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모든 대중 개개인의 취향, 기괴함, 상상력, 실패, 농담, 목소리, 캐릭터를 통해 문화는 끊임없이 창조될 것이다.
바쿠닌은 『독일에서의 반동』에서 “파괴를 향한 열정은 창조를 향한 열정”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새로운 시대의, 해방세상의 자유로운 문화를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그 무엇보다 열정적으로, 현존하는 독점적 문화창조의 체제를 파괴해야 한다. 그리고 그 파괴는, 더 이상 주어지는 ‘대중문화’를 받아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대중이 원하는 문화를 원하는 만큼 창조해 낼 때 비로소 오리라.
그리고 그때야말로 우리가 대중문화비평을 시작할 때 썼던 말마따나, “문화가 가지고 있는 개별성과 창조성이야말로, 아나키즘이 혐오하고 획일적이고 권위적이며 관료적인 국가권력에 반할 수 있는 것”이라는 개념이 현실로 드러난다. 그러니, 우리 함께 인터넷 방송을, 더 나아가 대중문화를 더 많이 향유하고 즐기며 함께하자. 그리고, 누군가의 손에 이것이 독점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창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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