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번째 나팔소리가 천지에 진동할 제
조심스레 갈고 갈아온 이 칼을 뽑아드노라
저주받은 자의 애닯은 혁명이로다
광풍속으로 달려들 제 비명속에 나뒹구는
저 원수의 주검을 보리라
새천년이 문을 연 2000년, Y2K 버그는 인류를 멸망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한국의 펑크밴드 노브레인은 혁명을 노래했다. 사회에 대한 청년의 분노로 맹렬히 진격하여 철옹성과 같은 체제를 무너뜨리겠다는, 새 시대의 민중가요였다.
그리고 7년 뒤.
그렇게 세계는 멸망했다.
<청년폭도맹진가>를 부르던 밴드가 이명박의 이름을 연호했다. 홍대 밴드신의 소음이 선거유세가 되어버렸고 불온한 의미를 담은 가사는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흥겨운 후렴으로 변했다. 조선펑크의 상징과 이명박이라는 이름이 하나로 뭉쳐진 순간, “배신자!”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노브레인이라는 밴드 하나의 배반으로만 이 사건을 정리할 수 있을리는 없다. 좋았던 과거에 혁명을 노래했던 사람들이 유명해지고 나니 돈과 권력을 선택했다고 비난하면 끝나는 문제가 돼버리니까.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그저 이 일에 대하여 “우리는 순수하지만 시장주의에 찌든 저들이 타락한 것”으로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예술가 개인의 도덕성을 비판하며,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시장 바깥에 남아있으면 달빛요정이 역전만루홈런을 치고, 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이번엔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다. 대중에게 선택받지 못한다면 사라질 것이오, 선택받으면 기존에 하던 방식대로 존재하기는 어려워진다. 시장의 바깥에서는 빈곤의 늪에 빠질 수 밖에 없고, 시장 안으로 진입한 순간 나를 바꿔야만 한다. 노브레인 하나의 배신일 뿐일리는 없다. 자본주의 대중문화 속에서, 인디와 반문화-카운터 컬쳐가 견뎌내야 하는 생태계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고 상업화 자체를 모든 악의 근원으로 돌릴 수도 없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가장 좋아했던 노래 중 하나는 아이브의 〈Baddie〉였다. 그전까지 나는 아이돌 음악을 좋아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남들이 빅뱅과 비스트와 엑소를 좋아하던 시절에는 브로콜리너마저나 윤도현밴드를 들었고, 고등학생이 된 뒤에는 홍대병이 심해져 역설사의 게임에 중독돼버린 나머지 그 BGM들을 생산해냈던 스웨덴의 메탈밴드 사바톤의 음악을 즐기기도 했다.
나는 한 평생 아이돌 음악 같은 것과는 연관이 없을 줄 알았다. 입대하기 전 까지는. 군대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훈련과 작업을 마치고 생활관에 돌아왔을 때, 딱히 막 심오하고 대단한 음악을 들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귀에 바로 감기고 박자가 선명하며,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알아듣는 노래가 필요했다. 그렇게 나는 아이브와 뉴진스의 음악을 들었고, 아이돌 음악의 발표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음악들은 정말 잘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가 종종 대중음악을 비판할 때에, 그것이 상업적이라는 사실부터 공격하곤 한다. 대형 기획사가 처음부터 팔기 위해 태어난 음악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팔기 위해, 팔리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만으로 음악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대형 기획사가 제작했다고 해서 멜로디와 편곡, 믹싱과 보컬의 완성도가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뉴진스의 Attention 같은 음악을 들었을 때, 그 특유의 몽환적인 느낌은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이게 아이돌 음악이라고?” 라는 쇼크를 주었을 정도였으니까.
아이돌 음악 한 곡은 작곡과 편곡, 녹음과 믹싱, 안무와 영상, 홍보를 담당하는 수많은 사람의 노동을 거쳐 나온다. 우리가 이어폰으로 듣는 몇 분짜리 음악은 거대한 사회적 생산의 결과다. 현대 대중음악은 산업이며, 우리가 현대사회의 산업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상, 산업이라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녹음기술과 음향장비, 공연장과 유통망, 방송과 스트리밍 플랫폼이 없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대부분의 음악은 애초에 우리에게 도달하지조차 못했을 것이다. 산업이라는 것은 현대 대중음악이 존재하도록 하는 물질적 조건일 뿐,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이 산업이 팔리는, 혹은 팔리기 위한 음악만을 살아남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흔히 우리는 “인디”를 하나의 장르나 취향처럼 말한다. 작은 공연장과 어두운 조명, 덜 정제된 목소리와 거친 기타 소리, 약간의 우울함과 빈티지한 질감이 있으면 그걸 대충 인디라고 부르고는 한다. 그러나 인디는 딱히 특정한 소리나 분위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음악을 누가 소유하고 제작하며 유통하는지,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그 과정에서 얼마나 자율성을 가질 수 있는지에서 나타나는 차이에 가깝다.
따라서 유명해졌다는 이유만으로 곧장 인디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며, 공연장이 작고 기타 소리가 거칠거나 보컬이 독특하다 하여 반드시 독립적인 것도 아니다. 거대자본의 제작구조 안에서도 인디처럼 들리는 음악은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고, 작은 공연장의 예술가도 시장과 플랫폼에 철저히 종속될 수 있다. 인디와 메이저의 차이는 사운드가 얼마나 덜 메이저하느냐가, 아니라 음악을 둘러싼 생산관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디의 감성은 얼마든지 메이저 산업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렇게 된다. 대형 기획사도 낡은 건물에서 뮤직비디오를 찍고 거친 필터를 씌울 수 있으며, 덜 다듬어진 듯한 목소리를 정교하게 연출할 수 있다. 실패한 청춘과 진정성, 소규모 공동체의 친밀함이라는 소위 “감성”은 훌륭한 상품이 된다. 자본은 인디를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디의 표면을 사랑한다.
인디 음악인이 가난할지라도 “인디 감성”은 잘 팔리고는 한다. 공연하는 사람은 다음 달 월세를 걱정하지만, 그 사람이 만들어낸 낡고 우울하면서도 진정성 있어 보이는 질감은 광고와 드라마와 아이돌 콘셉트 안에서도 멀쩡하게 살아남는다. “인디” 그 자체는 가난할지언정 인디풍은 얼마든지 부유해질 여지가 가득하다.
한때 인터넷과 플랫폼들이 이 모순을 해결할 것처럼 보였다. 이제 누구나 자신의 음악을 유튜브에 올리고, 인스타그램으로 공연을 홍보하며, 작은 장비만으로 방 안에서 노래를 만들 수 있었으니까. 음악을 만들고 발표하기 위한 진입장벽은 분명히 낮아졌었다.
그러나 음악을 시작하기 쉬워진 것과 계속하기 쉬워진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제 예술가는 음악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영상을 찍고 계정을 관리하며, 공연, 굿즈, 자신의 일상까지 홍보해야 한다. 자기 자신과 작업과 생활 전체를 콘텐츠로 바꾸어야만 한다. 음악인이 아니라 1인 기업이 되어야만 한다.
플랫폼은 음악을 발표할 자유를 주었지만, 음악을 하며 살아갈 자유까지 주지는 않았다. 기획사와 방송국의 문턱이 낮아진 자리에 알고리즘과 팔로워 수, 조회수라는 새로운 문턱이 생겼다. 생산의 진입장벽은 낮아졌지만 생존의 장벽은 그대로 남았다.
그렇게 많은 예술가들은 질문을 듣곤 한다. 때로는 스스로 묻고는 한다. 대중이 듣지 않는 음악은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가. 공연에 열 명밖에 오지 않는 밴드는 실패한 것인가. 조회수가 백 회도 되지 않는 노래는 존재할 가치가 없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본주의 사회는 비주류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공연에 몇 명이 왔는지, 앨범은 몇 장 팔렸는지, 그렇게 음악해서 돈은 되는지를 묻고는 한다. 선택받지 못한 것은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음악이 선택받기 위해 만들어지지는 아니다. 이를 테면 메탈과 하드코어는 시끄럽고, 펑크는 정돈되지 않았으며, 민중가요는 모두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태어난 음악이 아니다. 권력과 자본과 군대를 욕하는 노래가 광고주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대중이 반문화에 친절하지 않듯, 반문화 또한 대중에게 친절할 생각이 없다. 반문화는 익숙한 세상을 편안하게 장식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믿어온 질서에 소음을 내고 듣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만들어진다. 대중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반문화가 시장에 적응하지 못해 생긴 실수가 아니다. 그 불편함 자체가, 다수가 되지 못함 자체가 반문화가 존재하는 이유다.
반문화의 핵심은 규모가 아니라 주류 질서와 맺는 관계에 있다, 마치 “인디”와 같이. 주류 질서에 맞서고 그것이 감추는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 반문화라면, 반문화는 주류가 되는 순간 자기 성격을 잃어버리고 만다. 펑크의 옷차림과 힙합의 몸짓은 팔 수 있고, 혁명의 구호는 흥겨운 후렴구로 만들 수 있다. 조선펑크의 뿌리와도 같은 우리의 노브레인이, 혁명과 저항을 노래하던 펑크의 상징이 “넌 내게 반했어”라는 사랑노래를 부르더니 “이번엔 이명박”을 부르던 순간 더 이상 그것이 “펑크”도, “반문화”도 아니게 된 것을 보라.
체제를 공격하던 소리가 체제의 홍보곡이 되는 순간, 그 음악이 과연 살아남은 것인지, 아니면 껍데기만 살아남은 것인지는 보아야 한다. 자본주의 대중문화 속에서 살아남는 가장 쉬운 방법은 조금 덜 불편해지는 것이다. 가사를 순하게 바꾸고, 공연장과 방송국과 플랫폼과 광고주가 이해할 수 있는 (혹은 용인할 수 있는) 언어로 자신을 바꾸면 된다. 시장은 그렇게 성공한 반문화 (아님) 의 신화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생존하기 위해 음악을 바꾼 사람을 그저 간단히 비난할 수도 없다. 문제의 핵심은, 타협한 개인이 아니라 타협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게 만드는 조건에 있다. 시장 속으로 들어간 예술가에게는 왜 순수하지 못하냐고 비난하며, 시장 바깥에 남은 예술가에게는 왜 성공하지 못했냐고 비난하는 것. 어느 쪽을 선택해도 패배하도록 만들어놓고, 그 책임을 예술가 개인에게 묻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양태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음악 시상식에는 장르 부문이 생기고, 문화재단과 정부기관은 예술가 지원사업을 만든다. 이런 지원이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공연 한 번을 더 하고 앨범 한 장을 더 만들 수 있게 하며, 당장의 활동을 이어갈 시간을 줄 수는 있으니까.
그러나 제도적 인정과 생존이 등치되지는 않는다. 상을 받았다고 월세가 낮아지는 것도 아니고, 장르 부문이 생겼다고 연습실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일부 예술가는 지원금을 받을 수 있지만 절대다수는 선정되지 못하며, 예술가는 음악에 더해 자신이 지원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지원해줄 이들의 시선과 방법으로서 증명해야만 한다. 플랫폼에서는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고, 국가 지원에서는 심사위원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선택하는 주체만 바뀌었을 뿐이다.
더구나 국가의 보호는 언제든지 통제가 될 수 있다. 국가는 지원할 음악과 지원하지 않을 음악을 고를 수 있다. 화이트리스트와 블랙리스트는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둘 다 국가가 예술을 분류하고 관리할 권리를 가진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국가가 반문화를 보호하는 순간, 어떤 반문화가 보호받을 자격이 있는지도 국가가 판단하게 된다. 그 자체로 모순일 수밖에.
그렇다고 모두에게 하드코어 메탈을 의무적으로 듣게 하는 것이 해답인가? 반문화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취향을 통제한다면 그것은 해방이 아니라 또 다른 권위를 통한 폭력일 뿐이다. 아이브를 듣고 싶은 사람은 아이브를 들으면 되고, 평생 하드코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아무 문제가 없다. 모든 사람이 모든 음악을 좋아해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그 전제부터도 잘못되었다. 핵심은, 대중이 좋아하지 않는 음악도 누군가는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자유공산주의전선에는 예술활동을 하는 동지가 있다. 그 동지는 콜센터에서 일하고 퇴근한 뒤 합주를 하며 주말이나 시간적, 공간적 여력이 될 때 공연한다. 하루의 대부분을 생계노동에 사용한 뒤 남은 시간과 체력으로 음악을 한다. 월세와 생활비를 내고 남은 돈으로 악기와 연습실을 마련하고, 공연이 끝나면 다시 월요일의 노동으로 돌아가며, 그것을 반복한다.
이런 삶에서 반문화가 오래 버티지 못하는 것은 열정과 실력이 부족해서는 아닐 것이다. 사람에게 음악을 계속할 시간과 체력, 생활의 여유가 남지 않기에, 반문화는 서서히 꺼져갈 수 밖에 없게 된다.
결국 음악의 자유는 음악 그 자체에서만 끝나지 않는 것이다. 노동의 문제로 넘어간다. 반문화를 살리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사람들의 취향을 세뇌조교하여 강제로 바꾸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자기 시간 전부를 팔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임금과 주거가 안정되어야만 전업 음악인이 아니더라도 음악을 계속할 수 있게 될테니까.
시장에 선택받지 못했다고 실패한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공연에 열 명밖에 오지 않아도 그다음 공연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음악이 알고리즘에 맞지 않고, 광고주에게 불편하며, 국가와 자본과 군대를 욕하더라도 삶 전체가 박살나지 않고 계속 만들 수 있어야 한다. 팔리지 않는 것을 만들 자유는, 곧 팔리지 않아도 굶지 않을 자유 위에서만 가능하다.
대중음악은 대중이 선택한 음악이다. 그러나 문화 전체가 대중의 선택으로만 구성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이 선택하지 않는 음악, 대중을 불편하게 만드는 음악,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날 누군가에게 정확히 취향저격을 하도록 만드는 음악 또한 존재할 이유가 있다. 반문화를 생산하고, 이를 들으며 다시 재생산하는 이들이 그 확실한 예시다. 시장에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하나의 경제적 결과일 뿐, 그것이 문화적으로 죽어야만 한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자본주의 체제 속의 시장은 팔리는, 팔리기 위한 음악만 살려둔다. 국가권력은 관리할 수 있는 장르, 주제의 음악만 보호한다. 그렇다면 반문화는 사람들이 자기 시간을 되찾고, 굶지 않고도 실패할 수 있으며, 음악이 직업이 아니어도 삶의 일부로 남을 수 있는 곳에서, 꿋꿋이 살아남아야만 한다. 예술의 해방은 예술가들에게 상을 하나 더 주거나, 특정 장르를 국가가 보호구역으로 지정하는 것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자기 삶 전체를 팔지 않아도 되는 것이 예술 해방의 물질적 조건이다.
내가 춤출 수 없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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