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종의 삶을 떨쳐 반교육의 벽 부수고 침묵의 교단을 딛고서 참교육 외치니

드라마 《참교육》을 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참교육이라는 단어가 어디까지 와버렸는지를 보았다. 전교조의 슬로건에도 있는 참교육, 학생을 하나의 인간으로 대우하고 학교를 입시 사육장이 아니라 공동체로 만들자던 그 참교육 말고. 인터넷 댓글창에서 “저 새끼 참교육 마렵다” 할 때의 그 참교육. 누군가를 시원하게 두드려 패고, 무릎 꿇리고, 울리고, 굴복시키는 “밈”으로서의 참교육 말이다.

원작도 그랬지만, 이 드라마는 제목부터 솔직했다. 이 작품은 교육을 말하는 척하지만, 사실 교육에는 딱히 관심은 없다. 학교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학생과 교사는 왜 서로를 증오하게 되었는가, 교실은 왜 수업이 아니라 관리와 통제의 장소가 되었는가. 이런 귀찮은 질문들은 적당히 뒤로 밀려난다. 대신 화면 위에는 교권이 무너진 학교가 나오고, 그 안에서 교사는 무력하고, 학생은 괴물이 되어 있으며, 학부모는 악마처럼 학교를 들이받는다. 그리고 그 모든 지옥도 위에 구원자처럼 등장하는 것이 있다. 교권보호국. 이름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무언가다. 국가가 허락한 사이다. 법률로서 승인되는 죽빵. 교육부 산하의 액션 히어로.

보라. 참교육이다. (원작 웹툰의 한 장면)

그런데 이상하다. 우리가 예전부터 보아왔던 일진물, 복수물, 후피집, 사이다물의 세계에서 복수의 주체는 대체로 괴롭힘당하던 사람 자신이었다. 교실 구석에서 얻어맞던 찐따가 어느 날 갑자기 싸움을 잘하게 된다. 왕따당하던 주인공이 이상한 능력을 얻는다. 세계의 법칙이 바뀌고, 더 이상 돈 많고 힘센 일진들이 깝칠 수 없는 판이 열린다. 물론 유치하다. 대체로 조악하다. 보고 있으면 손발이 말려 들어가서 인간이 아니라 반건조 오징어가 되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래도 그 서사에는 하나의 분명한 구조가 있었다. 당한 놈이 되갚아준다는 것. 고통받은 사람이 직접 돌아와 사이다를 자아낸다는 것. 약자가 강자에게 복수한다는 것.

그것이 대중에게 인기있는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이다. 현실에서는 그게 잘 안 되지 않기 때문에. 현실의 왕따는 내일 갑자기 종합격투기 천재가 되지 않는다. 현실의 찐따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더니 재벌 3세로 회귀하지 않는다. 현실의 피해자는 괴롭힘의 기억을 안고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가고, 회사를 가고, 술자리에서 “그때 진짜 힘들었지” 같은 말을 하면서 허탈하게 웃고, 집에 돌아와 과거를 되새기거나 애써 잊으며 잠에 들고, 다음날 다시 출근한다. 그러니 판타지 속에서라도 직접 돌아와 한 방 먹이는 장면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사이다”였다.

그런데 드라마 《참교육》은 조금 다르다. 여기서는 복수의 주체가 피해자 자신이 아니다. 소위 침해받고 피해받는 교사가 직접 싸우는 것도 아니다. 학생들이 자기 학교를 뒤집어 엎어버지도 않는다. 대신 누군가가 온다. 특수부대 출신이 온다. 초법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 온다. 법이 허락한 주먹이, 몽둥이가 온다. 그리고 그들이 대신 해준다.

이제 복수조차 위임된다.

내가 맞서 싸우는 것도 귀찮다. 내가 단련하는 것도 싫다. 내가 공부해서 검사가 되는 것도 너무 먼 이야기다. 내가 돈을 벌어 재벌이 되는 것도 너무 오래 걸리거나 현실적이지 않아보인다. 그러니 누군가 대신 와서 해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다치지 않고, 내가 책임지지 않고, 내가 피 흘리지 않고, 내가 인간관계를 망치지 않아도, 내 앞을 막는 저 괴물 같은 놈들이 어디선가 나타난 더 강한 괴물에게 얻어맞았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내가 아닌 누군가가 “대신” 해주었으면 좋겠다, 라는 것이다.

물론 소위 “교권침해” 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학생이 교사를 조롱하고, 수업을 방해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그것을 촬영하고, 인터넷에 올리고, 학부모가 민원을 넣고, 교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들은 분명 존재한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이고, 누군가에게는 트라우마이며, 누군가에게는 퇴직 사유일 것이다. 그러니 교권이라는 말을 꺼내는 사람들을 모두 그저 까내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학교 현장은 실제로 무너지고 있다. 교사는 실제로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시작한다. 지금 말해지는 “교권의 회복”이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회복하려는 “교권”은 무엇인가. 교사가 학생을 다시 때릴 수 있는 권한? 학생을 조용히 앉혀놓는 힘? 학부모를 찍어누를 권리? 문제 학생을 격리할 수 있는 권리?

이 질문을 피하는 순간, “교권 회복”은 곧바로 응징으로서 변모한다. 학생인권조례를 없애라! 촉법소년들을 엄벌에 처하라! 문제 학생을 분리하라! 악성 민원을 처벌하거나 금지하라! 교사를 보호(?)하라! 다 맞는 말이라 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만이 남았을 때, 학교는 더 나은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정교한 수용소가 될 뿐이다. 학생을 때리던 몽둥이가 사라진 자리에, 행정서류와 법률 조항과 CCTV와 녹음기와 고소장이 들어오는 것뿐이다. 회초리가 사라졌더니 전자발찌를 상상하는 꼴이다. 역시 인간은 진보한다. 아주 끔찍한 방식으로.

한 번 과거의 학교를 떠올려보자. 지금 《참교육》이 그리는 세계가 학생이 교사를 압도하는 권리역전의 판타지라면, 그 반대편에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학교가 있었다. 야만의 시대였다. 뭐만 하면 때렸다. 숙제를 안 해도 때리고, 머리가 길어도 때리고, 떠들어도 때리고, 조용해도 마음에 안 들면 때렸다. 촌지야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로 흔했다. 한 때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는 전교조 교사로 구분하고 탄압하던 시절도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학생은 사람이라기보다는 교사가 관리하는 미성숙한 물건? 짐승? 에 가까웠다. 교사의 말은 명령이었고, 학생의 항변은 버릇없음이었다. 집에 가서 맞았다고 하면 부모에게 한 번 더 맞는 일도 낯설지 않았다. 가정과 학교와 국가가 아름답게 협력하여 학생을 줘패던 시절. 참으로 눈물겨운 교육공동체였다.

그 시절을 그리워할 수는 없다. 그 시절의 “교권”은 교육적 권위라기보다 폭력과 위계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러니 오늘날 “교권 회복”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 물어보자. 당신들이 회복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교사가 학생과 함께 학교를 다시 세울 수 있는 권위인가. 아니면 학생이 다시 교사 앞에서 침묵하던 시대인가. “교권”이라는 이름으로 정말 교육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학생이 덜 무서워진 교사의 불안과, 학생을 더 세게 처벌하고 싶은 사회의 욕망을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입시가 있다. 늘 그렇듯이, 대한민국의 모든 길은 대학으로 통한다. 아니, 대학으로 통한다고 믿게 만든다. 실제로는 대학을 가도 먹고살 수 있을지 알 수 없고, 대학을 안 가면 더더욱 먹고살 수 없을 것 같은 불안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도 학교는 학생들을 교실에 가둔다. 공부하기 싫은 학생도, 공부와 다른 재능을 가진 학생도, 당장 학교를 벗어나 다른 삶을 살아야 할 학생도, 모두 같은 책상 앞에 앉힌다. 입시라는 이름으로.

옛날에 유행하던 말이 있었다. 학생이라는 죄로 학교라는 교도소에서 교실이라는 감옥에 갇혀 출석부라는 죄수명단에 올라 교복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공부라는 벌을 받으며 졸업이라는 석방을 기다린다. 참으로 중2병의 결정체 같은 문장이다. 손발이 오그라든다. 그런데 슬픈 일은, 이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는 점이다. 교실이 입시를 위한 수용소가 되었다는 비판은 1980년대 후반부터 여전히 지금까지도, 교사운동과 교육운동 안에서도, 학생들 그 스스로러부터도 반복적으로 제기되던 문제였다. 더더욱 슬픈 일은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는데도 학교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학교가 입시 수용소가 되면 교사는 교육자가 아니라 관리자가 된다. 학생의 삶을 함께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적과 태도와 출결과 민원을 처리하는 사람이 된다. 학생은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통제 대상이 된다. 수업은 배움이 아니라 견딤이 된다. 교실은 지식과 관계가 만들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모두가 각자 다른 이유로 버티는 대기실이 된다. 교사는 버티고, 학생도 버틴다. 학부모는 불안해하고, 교육청은 관리한다. 그 사이에서 교육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아마 전산화되고 문서화돼서 NEIS 어딘가와 생활기록부 어딘가에 입력되어 있지 않을까?

이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는 있었다. 전교조를 비롯한 교사운동과 교육운동은 학생을 맞아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 대우하자고 말했다. 학교를 입시 기계가 아니라 공동체로 만들자고 했다. 체벌을 없애자고 했고, 학생인권을 말했고, 참교육을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밈이 되어버린 참교육이 아닌, 정반대의 “참교육” 말이다. 학생을 패는 것에서 카타르시스와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 아닌. 학생과 교사가 학교를 함께 바꾸자는 것이.

하지만 그 시도는 완전히 승리하지 못했다. 교사운동은 시간이 갈수록 자기 정체성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했다. 교사는 교육자인가, 교육노동자인가. 물론 둘은 대립하지 않을 수 있다. 교사는 노동자이면서 교육자일 수 있다. 문제는 노동자라고 말하면서 교육노동의 내용을 다시 만들지 못했고, 교육자라고 말하면서 학생과의 관계를 새롭게 세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남은 것은 안정적인 직업으로서의 교사, 지식 전달자로서의 교사, 행정업무에 치이는 공무원으로서의 교사였다.

그렇게 교사들은 교육자로서의 권위는 원하지만, 교육자로서 학생과 부딪히는 일은 점점 감당하기 어려워한다. 노동자로서의 권리는 원하지만, 교육노동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집단적 상상력은 희미해진다. 그래서 교권 회복 요구는 자연스럽게 직업적 안전장치의 요구로 나타난다. 악성 민원에서 보호해달라. 문제 학생을 분리해달라. 법적 책임을 줄여달라. 수업권을 보장해달라. 이것들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학교가 살아나지 않는다. 교사가 위험한 민원과 위험한 학생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직업인으로만 남는다면, “교권”은 교육적 권위가 아니라 그냥 산업재해를 예방하는 무언가로서 남게 된다. 정말 그걸 원하는게 과연 맞는 것인가?

학생인권도 마찬가지다. 학생인권조례는 필요했을 것이다. 소년법적 보호도 필요했을 것이다. 학생을 어른의 소유물이나 교사의 부속품처럼 다루던 시대를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학생과 교사 사이의 실제 관계 속에서, 충돌과 대화와 합의 속에서 만들어졌는가 하는 점이다. 많은 경우 그렇지 못했다. 학생인권은 법과 조례의 형태로 위에서 내려왔다. 국가권력이 “이제 학생에게 이런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선언이라는 것이 필요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선언만으로 공동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권리가 아래로부터 구성되지 못하면, 권리는 행정 규정이 된다. 교사는 규정을 지키면 된다. 학생은 규정을 들이밀면 된다. 학부모는 민원을 넣으면 된다. 교육청은 공문을 보내면 된다. 모두가 자기 앞의 절차를 기계적으로 수행할 뿐이다. 그 와중에 누구도 서로를 설득하지 않는다. 누구도 공동의 질서를 만들지 않는다. 학생인권은 학생의 자율이 아니라 학생을 관리하는 또 다른 행정의 언어가 된다. 학생은 주체가 아니라 보호 대상이 된다. 동등한 인간이라기보다 미래의 인적 자원, 아직 덜 큰 민원인, 법적으로 다루기 까다로운 미성년자가 된다. 참으로 인간적인 사회다. 인간을 보호한다면서 끝내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그렇기에, 교권과 학생인권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학생의 권리가 강해지면 교사의 권리가 약해지고, 교사의 권리가 강해지면 학생의 권리가 약해지는 것이 아니다. 둘 다 학교 안에서 제대로 구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생도 학교의 주체가 아니고, 교사도 학교의 주체가 아니다. 교직원도 학교의 주체가 아니다. 학교의 주인은 이사장이거나, 교장이거나, 교육청이거나, 입시제도이거나, 학부모의 불안이거나, 국가의 행정이다. 정작 그 학교에서 배우고 가르치고 일하는 사람들은 학교를 운영하지 못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학생자치와 학교자치다. 학급회의가 “이번 주는 선생님께 인사를 잘합시다” 같은 말도 안 되는 요식행위로 끝나서는 안 된다. 실제 예산과 권한이 있어야 한다. 한 반에 작은 예산이라도 주고, 그 돈을 어떻게 쓸지 학생들이 토론하게 해야 한다. 피자를 먹을 것인가, 햄버거를 먹을 것인가. 책을 살 것인가, 교실에 필요한 물건을 살 것인가. 아마 치열하게 싸울 것이다. 피자파와 햄버거파가 분열하고, 다수결에 불복한 햄버거파가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게 “정치” 란 것 아니었던가. 한정된 자원을 두고 싸우고, 설득하고, 지고, 다시 조직하는 것. 우리는 이것을 “민주주의” 라는 것으로 규정하기로 했다.

학생이 교사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교사를 소비자의 별점 대상으로 만들자는 뜻은 아니다. 교육이 관계라면, 그 관계의 한쪽 주체인 학생에게도 발언권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교사도 학생과 함께 학교의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교직원도 학교 운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학교에서 청소하고, 급식을 만들고, 행정을 처리하고, 시설을 관리하는 사람들 없이 학교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데 왜 학교의 질서를 만드는 자리에는 늘 이들이 빠지는가. 학교가 공동체라면, 공동체를 굴러가게 하는 모든 사람이 그 운영의 주체여야 한다.

물론 이것은 시끄러울 것이다. 회의는 길어질 것이고, 합의는 자주 깨질 것이고, 학생은 교사에게 대들 것이고, 교사는 학생에게 화낼 것이고, 교직원은 “아니 이걸 왜 우리가 또 해야 하냐” 고 말할 것이다. 그래도 그게 낫다. 위에서 내려온 조용한 질서보다, 아래에서 만들어지는 시끄러운 질서가 낫다. 규정으로 눌러 만든 평화보다, 싸우고 합의해서 만든 불안정한 평화가 낫다. 권리는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무도 불편하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권리는 없다. 누군가 책임지며, 누군가는 불편하나, 결국 모두가 관여하게 되는 것이 바로 권리이니까.

드라마 《참교육》이 보여주는 것은 “교권 회복”의 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학교 안의 자치와 관계 회복을 얼마나 상상하지 못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징후다. 교사가 학생과 직접 마주하고, 학생이 교사를 하나의 인간으로 마주하고, 그 안에서 서로의 권리와 한계를 구성하는 상상력은 사라진다. 대신 국가가 허락한 주먹이 온다. 법이 승인한 폭력이 온다. 누군가 와서 해준다. 참교육해준다. 이 얼마나 편안한가. 이 얼마나 수동적인가. 이 얼마나 파시즘적인가.

교권은 특수부대 출신 교권보호국 현장감독관 나화진 씨가 회복해줄 수 없다. 교권보호국이 학교에 들어온다고 교육이 살아나지 않는다. 학생을 제압하는 힘은 교권이 아니다. 학생을 침묵시키는 힘도 교권이 아니다. 교권은 학생과 교사가 서로를 하나의 주체로 인정할 때 생겨난다. 교사가 학생을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학교를 구성하는 인간으로 볼 때, 학생이 교사를 단순한 관리자나 적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볼 때, 그때 비로소 교권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결국 물어야 할 것은 하나다. 학교를 누가 운영할 것인가.

이사장? 교장? 교육청? 학부모? 입시제도? 아니면 그 학교를 다니는 학생, 그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사, 그 학교에서 일하는 교직원?

우리는 가장 마지막, 길게 늘여진 것들이라고 말해야 한다. 학교의 주인은 학교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교권의 회복은 학생인권의 후퇴에서 오지 않는다. 학생을 두드려 패는 카타르시스에서 오지 않는다. 누군가 대신 해주는 참교육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학교 안의 주체들이 스스로 학교의 질서를 만들 때, 서로 부딪히고 대화하고 싸우고 합의할 때, 위에서 내려온 규정이 아니라 아래에서 만들어진 자치가 학교를 움직일 때 비로소 시작된다.

그러니, 참교육을 기다리지 말자. 누군가 와서 해주는 참교육 말고, 우리가 학교를 다시 운영하는 교육을 말하자. 학생과 교사와 교직원이 함께 학교의 주인이 되는 것. 교권도 학생인권도 그곳에서 다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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