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강정마을에서 공연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예술해방전선에서 활동하는 동지가 어느 날, 내게 물어왔다. 이번에 강정마을에서 강정피스앤뮤직캠프 라는 행사가 열리는데, 공연을 해줄 수 있느냐 했기에 수락했던 것 뿐이다.
강정마을에 대해서 예전부터 잘 알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워낙 그 존재 자체가 유명했기 때문에 어떤 곳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군사주의와 국가 폭력이 공존하며, 해군기지 건설 반대투쟁과 평화운동의 장이 펼쳐져 있는 곳. 내게 있어 이 곳에서 공연을 하는 것은 평범한 공연을 넘어서, 나의 음악이 이 곳의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다가갈 것인가. 이 무대에 선 아티스트들은 어떤 방식으로 평화를 말하고 들으며 경험하는가, 라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했다.
내가 하는 음악이 메탈코어였기에 고민이 되고 걱정되는 지점들이 적지 않았다. 빠른 리듬, 거친 보컬, 강한 드럼과 기타 사운드는 나와 내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해방감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소음 혹은 위협처럼 느껴질지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모싱, 서클핏과 같이 메탈코어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의 문화가, 서로 부딪히고 몸을 던지는. 에너지 넘치고 빠르지만, 어떻게 본다면 마초적이면서 누군가를 배제할 수 있는 분위기의 문화가 “평화”와 “반전”이라는 요소와 결합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걱정이 분명 많았었다.
그리고 공연 당일. 급하게 비행기 티켓을 구해서 양해를 구하고 공연 순서를 바꾸면서, 걱정과 고민은 극에 달했었다. 과연 우리가, 내가 내는 강한 소리가 어울릴 수 있었을까? 그리고 공연장에서 관객들은 내 걱정을 한 번에 날려주었다. 강강술래가 시작된 것이다.
서클핏과 강강술래 모두 원을 만들면서 빙빙 돌지만, 서클핏이 원을 만들며 빠르게, 그리고 강하게 서로 충돌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강강술래는 서로 손을 잡고 빙빙 도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기에, 강강술래에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다. 내 무대에서 관객들은 서클핏이 아닌 강강술래를 시작했고, 빠른 비트와 격렬한 목소리가 나올 때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것들이 조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여전히 내 공연은 격렬했지만,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고 돌면서 강강술래를 하기 시작할 때, 내 음악의 격렬함은 충돌을 넘어서게 되었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어린 아이들이 강강술래로 뛰어들어와 함께 돌았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메탈의 소리는 분명 낯설고 무서울 수 있다. 평범한 성인 남성들조차 눈살이 찌뿌려지게 만들 수 있는 사운드일텐데, 아이들에게는 오죽할까. 하지만 아이들은 공연장 밖으로 도망가는 것이 아닌, 오히려 강강술래에 함께 들어와 뛰어 놀았다. 어른들과 함께 손을 잡고 돌았고, 웃고, 떠들었다. 빠른 음악과 비트에도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놀 수 있는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이 경험은, 시끄럽고 무서우며 기분 나쁜 경험이 아니라, 재밌고 흥겨운 기억이 되었을 것이다.
이 경험이 강정마을에서 있었기에 더 특별한 경험이었다. 만일 이 곳이 평범한 공연장이었다면 내가 본 광경을 그저 “관객 반응이 좋았다” 정도로 기억했을지도 모르겟다. 그렇지만 강정마을이라는, 평화운동과 국가폭력의 흔적이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는 곳에서 있었기에. 내가 내는 빠르고 거칠고 시끄러운 소리가 사람들이 서로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손을 잡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내게 적잖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평화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흔히 평화를 조용하고 차분한 것으로 상상하고는 한다.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하며, 침착한 것 말이다. 그런 것 또한 평화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날 강정마을에서 내가 본 평화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메탈코어의 빠른 비트 위에서 뛰놀며, 거친 보컬 사이에서 웃고 있었고, 강한 드럼과 기타 사운드 속에서 서로 손을 붙잡고 도는 모습이 바로 평화였다. 평화가 꼭 얌전해야만 하는 것인가. 평화는 반드시 조용하고 단정한, 근엄한 모습으로만 찾아와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평화는 격렬할 수 있다. 나의 격렬함이 군국주의와 국가폭력을 겨눌 때, 그리고 그 사운드를 진정으로 남녀노소 즐길 때, 격렬함 또한 함께 평화로서 나타날 수 있게 된다. 격렬함이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고 함께 즐기게 만드는 순간, 우리의 격렬함은 파괴가 아닌 평화와 새로운 재구축의 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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